돌창고가 전시장과 공연장으로 변신, 일 년에 한 번씩 돌잔치를 열다

“남해에서 문화와 예술을 통해 삶의 방법을 찾는다면 남해의 문화를 우리의 행위와 연결해야 합니다” ‘돌창고 프로젝트’에 들어서면 벽면에 적혀있는 이 글귀가 눈에 쏘옥 들어온다. ‘행위’라는 말에서 돌창고가 전시와 공연의 공간 더 나아가 삶의 터전이 되는 행위를 과감히 실행하고 있다는 생각에 갑자기 마음이 울컥해진다. 젊은 ‘돌창고 운영자’의 표정에서 그동안의 고민과 애환 그리고 이 길을 밟아온 과정이 고스란히 진실하게 전해진다.
돌잔치는 아이가 태어나고 일 년이 되었을 때를 기념하는 날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돌잔치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조금 낯설었다. 하지만 돌창고 운영자인 김영호 씨는 아이의 돌잔치와 개념이 비슷하다고 한다. 돌창고에서 일 년 동안 했던 행위를 정리해서 합동전을 열고 공연도 하니까 일 년에 한 번씩 돌잔치를 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고 보니 돌잔치 앞에 몇 회라는 말만 붙이면 돌잔치라는 글자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단어였다. 지난 일 년을 들여다보고 수정하고 개선하는 일들이 모일 때 돌창고 운영자는 언제나 발전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작년 10월에 독일마을축제 때는 전시 없이 인문학수업과 영화 상영 공연이 있었다. 올해는 복잡할 것 같아 11월로 연기하여 두 번째 돌잔치를 열 예정이라고 한다. 일 년 동안 활동했던 작가들의 합동전도 열고 의견도 모으면 의미 있는 시간이 분명 될 것 같았다. 
부산이 고향인 그는 20002년도에 처음으로 가평에 귀촌을 했다. 여기에 오기 전에는 하동에서 3년 정도 지냈고 남해에 온 지는 4년이 되었다고 한다. 하동에서 알고 지내던 지인이 어느 날 돌창고가 있다는 정보를 줘서 시문리에 있는 돌창고를 친구가 먼저 샀고 몇 개월 후 본인도 대정에 있는 돌창고를 사게 되었다. 대정 돌창고는 지난 5월부터 리모델링 중인데 11월에 마무리가 되면 그곳에서 디자인 사무실로 활용하고 도자기를 만들고 판매도 할 예정이라고 한다. 대정 돌창고 주인인 그를 시문 돌창고에서 만난 이유는 그곳이 지금 한창 공사 중이었기 때문이다.

돌창고는 대부분 농협 소유이거나 마을 공동 소유여서 매도가 힘든 상태

돌창고는 196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농민들이 거름 비료 곡식을 보관하기 위해 지었던 건물이다. 현재 남해에는 13개 정도의 돌창고가 있는데 대부분이 농협 소유이거나 마을 공동 소유이다. 이번에 시문과 대정은 개인 소유로 돼 있었기에 그나마 매입이 가능했지만 다른 곳은 매도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어 더 이상 욕심을 내기 힘든 상태이다. 처음에 이것을 사서 어떻게 하겠다는 말을 했을 때 마을 사람들은 “젊은 애들이 뭐를 안다고 그렇게 하느냐”고 우려 섞인 말을 했지만 지금은 응원과 격려를 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돌창고에 대한 만족도가 큰 것 같아 앞으로 돌창고를 더 구입할 의사가 있는지를 물었더니 “계속 노력 중”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현재 마을에서 사용하지 않고 방치하는 돌창고가 있다고 하니 약간은 안타까움으로 남는 게 사실이다. 기회가 된다면 앞으로도 필요한 사람에 의해 새로운 변신이 시도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10월 전시 ‘기억보관창고 진솔이 엄마’ , 매월 둘째 주 토요일에 돌장이 열림

시문 돌창고에서는 7월에 세 번째의 전시회가 열렸고 10월에 네 번째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기억보관창고 진솔이 엄마’이다. 김진솔 화가가 하얀 천에 어머니의 기억을 그린 것을 걸개로 배치한 후 전시회를 열고 있다. 그곳에 간 날 화가는 큰 천을 바닥에 깔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10월 한 달 동안 전시 될 그림이 무척 궁금해졌다. 얼핏 보니 아날로그 감성을 잔뜩 느끼게 할 것 같은 예감이 뜨겁게 들었다.
시문 돌창고 주변에서는 매월 둘째 주 토요일에 프리마켓, 벼룩시장 같은 돌장이 열린다. 10월에 열리는 돌장은 이번이 13번째이다. 80%정도가 직접 손으로 만든 생활용품인 도마 옷 가방 향수 등이다. 남해에서는 물건을 만드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주변 지역인 삼천포와 사천에서 절반을 차지하고 나머지 절반은 지역민의 상품으로 장이 선다. 그리고 몇몇은 장터를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어서 어쩌면 활성화가 된 셈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귀촌을 한 사람들이 물건을 정성껏 만들어도 팔 경로가 여의치 않았는데 정기적으로 열리는 돌장을 이용하니 뿌듯하다고 한다. 귀촌인의 참여를 환영하고 반기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귀촌인의 애환을 함께 고민하고 그 사람들의 삶의 통로를 열어주는 그의 따뜻한 마음이 한동안 마음속을 떠나지 않는다.
작년 6월 돌창고 프로젝트를 개업하기 전, 창고는 습하고 벽에는 벌레가 기어 다니고 바닥은 질척거렸다. 그래서 벽면을 특수 페인트로 칠하고 스레트지붕 몇 장을 거둬내 하늘을 공간 속으로 끌어들이고 바닥에 콘크리트를 쳤다. 인공적인 손길을 많이 배제하고 자연적인 맛을 최대한 살리는 쪽으로 연출을 했다. 이 분위기 속에서 지금까지 거쳐 간 전시회는 모두 세 번이다. ‘1회 때는 김정수 화가의 정지비행과 아피통이야기 2회 때는 섬머 타임 3회 때는 오늘 너무 뜨거워서 산도 빨개져 버렸다’ 4회는 지금 한창 열리고 있는 ‘기억보관창고 진솔이 엄마’이다. 돌장은 누구나 참여하는 장터인데 매월 둘째 주 토요일 12시부터 5시까지 열린다.

DOL이라는 세 글자만 남은 세 개의 액자, 그들의 영원한 돌창고 사모곡

견치석으로 튼튼하고 견고하게 만들어진 돌창고가 누구에게는 그냥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로 보일 것이고 또 누군가의 시선에서는 가치를 부여하고 싶은 소중한 장소로 보일 것이다. 김영호, 그 사람에게 들어온 돌창고는 너무나 반짝이는 보물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얻기 위해 주인을 설득했고 앞으로도 설득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지역민들이 조금만 마음을 연다면 귀촌인들의 순수한 꿈이 쉽게 이루어지고 마을의 경제를 부흥시키고 소중한 자산을 알리는데 분명 많은 기여가 될 것이다. 관광객을 끌어오고 마을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는 이런 예술인의 역할이 절대로 무시될 수 없는 부분이다. 더불어 남해를 발전시키고 문화유산을 잘 보존하고 키워나가는 역할로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돌창고 프로젝트에는 어느 작가가 영어로 적은 글자를 모두 지우고 ‘DOL’이라는 세 글자의 알파벳만 남긴 작은 액자 세 개가 걸려 있다. 다른 글자를 까만 펜으로 지우고 남긴 세 글자 그건 이 사람들이 돌창고를 향한 사모곡이었다. 이 글자는 그들의 애정이 식지 않는 한 돌처럼 영원할 것임을 상징하는 듯했다. 요즘 지역민들도 돌장에 관심을 보이며 구경을 하고 돌창고 프로젝트의 문을 열고 들어와 커피를 마신다. 지역민과 하나로 살아가는 그들은 분명 우리 남해인과의 운명공동체였다. 남은 13개의 돌창고도 차츰 문을 열고 이 사람들의 품으로 서서히 안기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했는데 모퉁이 한켠에 놓여 있는 길쭉한 호박 하나도 그런 생각을 골똘히 하는 것처럼 보인다. 견치석으로 운치를 더한 돌창고에는 문을 열고 들어서는 입구에 ‘삼동면리 농협 보관’이라는 문구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그것을 일부러 지우지 않는 돌창고 운영자는 옛것을 사랑하고 새것으로 변화시키는 온고지신의 정신을 계속 이어가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흔적을 지우지 않고 새 것을 입히는 그들의 노력이야말로 남해를 지켜나가는 강력하고 끈질긴 힘과 정신이 아닐까싶다.
마지막으로 돌창고 프로젝트는 지역에서 문화와 예술로 삶의 방법을 모색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미션을 말해준다. “우리의 사용이 허락된 남해의 돌창고를 보존하고 재생한다. 최선을 다할 기회를 얻지 못한 창작자의 작품 활동 공간으로 제공한다. 적합한 방법을 활용해 폭넓은 사람들을 수용하고 그들이 문화와 예술에 접근할 수 있도록 경험을 기획하고 실현한다. 이와 같은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우리의 가치에 공감하는 공동체와 협력한다” 긍지와 자부심을 가득 담은 이 내용들은 돌창고만큼이나 단단한 언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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