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바다를 접하고 있는 넓은 공장에서는 자르고 두드리고 깎는 소리가 들어서는 순간부터 반갑게 들렸다. 요즘 조선업의 경기가 침체기라는 말들이 회자되고 있는 상황에서 들리는 이 소리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 소리보다 더 귀하게 품어진다. 여름 더위도 잊은 직원들이 눈인사도 주고받을 겨를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열심이다.
사무실로 들어서는 입구의 화이트보드에는 ‘무재해 기록판’이라 쓰여 있고 그 아래에는 목표 일과 달성 일을 기록하여 모두가 잘 볼 수 있게 해 놓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사무실의 쾌적함과 아늑함이 와락 안긴다. 장식장 위에 놓인 선인장 ‘모윤주’의 뾰족한 가시도 이상하리만큼 날카롭게 다가오지 않고 살갑다. 이 회사의 경영주가 직원을 대하는 심성과도 닮아 있는 듯한 사무실 분위기를 두고 나오려니 뭔가 모를 아쉬움이 따른다.
창남조선(김주숙)은 1988년 바로 여기, 이 자리에서 50평의 소규모 건물로 시작했다. 김주숙 사장님은 남해 사람으로서 보트사업을 시작으로 자수성가를 이룬 셈이다. 직원을 가족처럼 생각하고 맛있는 음식도 함께 나누며 작은 일에도 관심을 가지고 80여 명의 사원 안전과 건강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음을 느꼈다. 목숨과도 직결된 안전교육을 일순위로 꼽고 숙련된 기술을 실수 없이 발휘할 수 있도록 체계적인 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다. 이 회사의 경영이념은 “최선을 다해서 최고를 추구하자”이다. 그 속에는 ‘솔선수범’이라는 알맹이도 들어 있다고 전무(한희동)님이 넌지시 알려주었다. 늘 머리와 가슴에 이 소중한 문구를 간직했기에 오늘날 대지 5천 평에 건평 1천7백 평의 탄탄한 회사로 성장이 된 것 같았다.
FRP(합성수지)선박 건조, 수리를 주 업무로 하며 제조하는 배로는 각종 어선, 관공선, 레저용으로 사용되는 것들이었다. 이것은 어업, 여객선(도선), 스포츠, 관공선으로 적용되고 있다. 제조된 배의 99%는 어민들의 생계수단인 어선용으로 나간다. 선주들이 도면을 가져오기에 한 척의 배를 건조하는 데는 보통 2개월이 소요된다. 선박 납기일이 불가피한 사정으로 차질을 빚어도 선주들은 독촉을 하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주문한 배가 하자 없이 되도록, 빨리제작 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창남조선은 한 달에 두 척 정도를 건조하고 일 년에 20척 정도를 평균적으로 생산한다. 배를 톤수 즉 용적률로 크기를 규정하고 있는데 자연바람이 잘 통하고 높고 넓은 공장에서는 경비정인 15톤에서 어업용인 125톤까지 8개 정도의 몰더에서 제작되어지고 있다. 몰더의 수량에 따라 회사의 재무 상태를 파악할 수 있다고 하니 어떤 회사인지 잘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현장 직원들은 회사에서 제공한 일회용 바지, 방진마스크 그리고 긴 옷을 갖춰 입고 완전무장을 한 상태로 작업을 했다. 화학약품 냄새가 났지만 툭툭 트인 넓은 공장에서 공기 소통이 잘 되었으므로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동안 직업병으로 인해 병원 치료를 받은 직원도 없었고 고통을 호소한 적도 없었다고 한다. 현장에서는 산재 사고가 거의 없었지만 가끔 미미하게 손상을 입는 경우는 있다고 하신다. 직원들이 업무에 시달리지 않고 적당한 휴식을 취할 수 있기에 그런 불상사들이 많지 않은 듯했다.
1988년도에 창립했을 때는 직원도 몇 명 없었을 뿐 아니라 그 당시에는 다리도 없는 이곳 창선은 완전히 벽지였단다. 직원도 고작 창선에 살던 사람 4명, 삼천포 사람 17명이었다고 했다. 지금은 80여 명인데 외주업체에서 필요할 때마다 들어와서 기술을 제공해 주고 있기에 120여 명 정도가 되는 셈이었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비정규직은 없었고 정년퇴임 연령도 제한되어 있지 않았다. 창립 일부터 지금까지 근무하는 사람의 나이가 70을 훌쩍 넘겼다고, 하지만 아직도 일하는데 지장이 없단다. 간혹 결원이 생겼을 때는 지인을 통해 알음알음 충원이 되고 있다고 살짝 알려주었다.
배의 선체(몸체)는 창남조선에서 제작하고, 엔진 전자장비 유압장비 그리고 어구 장비 모두는 선주의 부담으로 제작하고 있었다. 원자재 부자재는 대기업인 한국화이바, 애경화학 등에서 제공받고 선박부속품은 부산 통영 등지에서 가져온다. 물류비가 많이 지출되긴 하지만 회사의 영업이익을 생각해 볼 때 그렇게 문제되지 않는 것 같았다. 건조된 배는 제주 및 충남 여수 등 전국적으로 나가지만 특히 동해안쪽으로 많이 나간다.
창남조선은 근로자들의 꽃인 복지시설이 잘 되어 있었다. 외국인들이 근무를 하므로 숙소를 무료로 제공하고,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준다. 통근버스가 항상 삼천포와 남해를 순회하며 출퇴근을 돕는다. 3년 이상 근무한 사람들은 건강검진비도 지원받고 있었다. 대체로 다른 곳보다 월급도 세고 복지혜택도 많이 받고 있는 셈이었다. 그래서 누구나 삼 개월만 잘 적응하면 장기근무로 이어지는 것 같았다.
직원들끼리도 유대 관계가 좋아 서로에 대해 잘 아는 편이었다. 선주들이 배를 진수할 때 가져온 음식이나 선물이 들어오면 직원들과 현장에서 바로 회식도 하고 나눠가지기도 한다. 지금도 사무실 바닥을 직접 청소하고 근검절약을 하시는 사장님은 1996년 도지사 표창, 1997년 성실납세자로 국세청장 표창, 1998년 마산지방해양수산청장 표창, 2010년 제7회 조선의 날 지경부장관 표창을 수여했다. 2014년 139톤급 트롤어선(동호호)FRP선을 최초로 건조도 했다. 옛날에는 트롤선이 철로 만들어졌지만 동호호의 호응이 좋아 이때부터 꾸준히 수주로 이어지고 있었다. 회사연혁을 보니 그동안 걸어온 회사의 발자취가 영롱하게 빛났음을 잘 알 수 있었다.
필자가 찾아간 날 마침 선박 한 척이 수리되어 주인 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암초에 부딪치거나 배끼리 부딪치거나 난파되어서 오는 배를 새 것처럼 수리해서 어민들의 어업활동을 신속히 돕고 있었다. 남해 어민들은 시간적, 경제적으로 창남조선의 득을 톡톡히 보고 있었다. 바닷바람과 산바람이 만나는 공장에서는 연장 다루는 소리와 직원들의 움직임이 조화를 이뤘다.
공장 지붕 아래에서는 나무들이 공장을 내려다보며 씩씩하게 자라고 있었다. 그곳에서 자라는 삼나무는 언제 큰 나무로 자라 배로 태어질지 모르지만 열심히 키를 키우고 있었다. 어느 나라의 역사책에 보면 어떤 신이 등장하여 “내 아들이 다스리는 나라에 배가 없어서는 안 될 일이다” 하여 자신의 수염을 뽑아 흩어지게 하니 삼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언제 이 나무가 자라 목선이 만들어질지는 모르지만 공장과 호흡하며 몇 십 년의 미래를 내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곳에서는 현재 FRP를 사용하기에 목선을 잘 만들지는 않지만 언젠가는 또 만들어질 날이 오지 않을까를 생각했다.


창남조선은 지역민을 위해 고용창출도 하지만 창선면에서 지원요청을 하면 다방면으로 협조를 하고 있었다. 그 밖에도 장애인협회, 각종 행사, 지역주민 지원 등으로 지역발전에 제대로 이바지하고 있었다. 주민들이 소음과 먼지로 생활이 불편할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 같아 보기 좋았다. 공장을 돌아보는 것에 마음을 뺏긴 나머지 사무실 앞쪽에 있던 강아지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시원한 곳에 마련된 개 집에는 먹다 남은 음식들이 조금 있었다. 그릇에 담긴 음식은 신선하고 영양가가 있어 보였고 대접을 받는다는 기분이 들게 했다. 이것도 동물을 사랑하는 주인의 고운 심성으로 다가온다.
창남조선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므로 언제나 떠오르는 여명의 찬란함을 지닌 채 발전에 발전을 거듭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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