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2007년 38년의 교단생활을 마감하고 현재 사천시에 거주하고 있다. 줄곧 집요한 정신력으로 도기념물 제6호 남해양아리석각 연구에 골몰해 오다, 석각의 도안자, 각석자, 각석 시기는 물론 북극성을 축으로 가을 하늘 전면의 성좌도와 각자를 통해 미궁에 빠질 뻔했던 남해양아리석각의 진상을 소상히 밝히고자 한다.
자연암에 새긴 남해양아리석각이 성좌도라는 근거는(아래사진⇮) 석각 왼쪽 아래에 새긴 글자 천(天) [그림 1]. 오른쪽 중앙에 있는 천체좌표, 지평좌표, 북극성 [그림 2]. 천문도의 약 ¼에 해당하는 반지름 92cm, 95cm의 호형구도 부채꼴 및 방위도 [그림 3]. 700여 년간 긴 세월 자연에 노출되어 마멸이 심한 24자의 각자 [그림 4]. 남해 양아리석각 필사 [그림 5]가 가을하늘의 성좌다.


천체의 자오선과 화강암에 새긴 선각의 경사면 방향이 일치하는 남해양아리석각의 성좌도는 북극성을 축(軸)으로 페르세우스자리(Perseus), 안드로메다자리(Andromeda), 카시오페이아자리(Cassiopeia), 삼각형자리(Triangulum), 페가수스자리(Pegasus), 조랑말자리(Equuleus), 백조자리(Cygnus), 도마뱀자리(Lacerta), 세페우스자리(Cepheus), 돌고래자리(Delphinus), 작은곰자리(Ursa Minor)와 성좌도 일부의 양자리(Aries), 염소자리(Capricornus), 물고기자리(Pisces), 현미경자리(Microscopium), 물병자리(Aquarius)에 이르며 가을하늘의 전면이다. 또한 성좌도의 여러 각자와 약자 ‘右畵十月十日十月十八日吉辰, 金敏成公圖, 崔金志石匠手, P, E, A, 左十月十日十月十八日吉, P, AD1270, N, Po, | ─, 天’이 근거이다.
즉(➥우측사진)「⑴ 右畵十月十日十月十八日吉辰(오른쪽 그림은 하늘을 뜻하며 10월 10일부터 10월 18일의 별자리 관측이 좋은 시기다), ⑵ 金敏成公圖(김민성 공 그리다), ⑶崔金志石匠手(최금지 석장수 새기다), ⑷ Pegasus(페가수스자리), ⑸ Equuleus(조랑말자리), ⑹ Andromeda(안드로메다자리), ⑺ 左十月十日十月十八日吉(10월 10일부터 10월 18일의 별자리 관측이 가장 좋은 시기임을 왼쪽에 다시 새기다), ⑻ Perseus(페르세우스자리), ⑼ AD1270(서기1270년에 새기다), ⑽ N(북쪽), Polaris(●, 북극성), ⑾ | ─(천체좌표, 지평좌표), ⑿ 天(하늘)」을 뜻한다.
대내외의 격동기로 역사상 남해안의 소요가 가장 심했던 고려 말 삼별초군의 여·몽항쟁(1270년~1273년)의 요새가 제주·진도·남해·창선·마산·김해·거제였고 한때 남해가 거점이었던 점에 비추어 서기 1270년 남해양아리석각의 각석 시기(그림 9)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우리의 전통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는 조선 태조 4년(1395) 석질이 좋은 흑요암에 새겼다. 그러나 마멸이 심해 292년 후 숙종 13년(1687)에 복각천상열차분야지도(複刻天象列次分野之圖)가 각석되었다.
중국 지린성 지안현 퉁거우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능비는 장수왕 2년(414년) 각력응회암(角礫凝灰岩)에 1775자를 새겼다. 이 비는 지금에 이르러 150여 자가 훼손된 상태이다. 남해 노량 충렬사 입구 오른쪽에 있는 자암김구선생적려유허추모비(自菴金絿先生謫廬幽墟追慕碑)는 영조 42년(1766)에 세웠다. 251년이 지난 현재 비명의 아래 2자 ‘慕碑’는 풍우에 시달려 읽기조차 어렵다. 비명 뒤의 비문 하단부는 판독마저 불가하다.
전국시대의 제(齊)나라(기원전 1046년경~기원전 221년)는 전국칠웅(秦, 燕, 魏, 漢, 楚, 趙, 齊) 중 진(秦)나라에 끝까지 항전하다 마지막으로 망한 나라이다. 패망 이듬해인 기원전 220년 방사 서불(方士徐市)이 배 60척, 동남동녀 3000명으로 불로초를 찾아 나섰다는 아이러니한 설에 붙여 자연에 노출되어 2200여 년이 지난 지금 청나라 말 하추도의 탁본에 의한 서불기례일출(徐市起禮日出)의 해독은 남해양아리석각의 현존상태의 이해에서 상식을 벗어난다.
성수(星宿)는 보통 비슷한 방향에 놓이지만, 실제로 같은 별자리에 속한 별들이 반드시 가까운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며 문화권과 시대별로도 성좌도에 차이가 있다. 현재는 1930년 국제천문연맹(IAU)에서 1875년의 춘분점을 기준으로 정한 88개의 별자리를 공통으로 쓰고 있다. 가을철 별자리그림인 남해양아리석각은 국제천문연맹에서 정한 별자리와 대부분 일치하는 13세기 삼별초군의 대몽항쟁 시기의 성좌도로 조선조 천상열차분야지도와는 판이한 일면이 있어 동서양의 성좌도가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성좌도에서 성수의 위치와 부분적 성좌도가 자세히 일치하여 선각의 성혈을 통해 이를 비교 이해할 수 있다.
(김민성 도안을 1270년 최금지 석장수에 의해 각석된 남해양아리석각)
선조의 뜻을 잘못 이해하면 이 땅의 후손들에게 웃음거리로 전락할 것임은 명약관화하다. 다음 세대에게 짐을 떠넘겨서도 안 되겠고 우를 범해서도 안 될 것이기에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만 한다. 최근 서불 전설은 심한 각색과 함께 우리의 자존심과 자긍심을 크게 자극하고 있다. 그 단편으로 2010년 11월 중국의 한 보고서에서는 ‘제주도민은 서불 또는 동행자의 후손’인 바 진나라 이후 중국 영토라 주장하고 있다. 이제 중국은 이 땅 어디에도 없는 서불과차를 들어 동북공정에 이어 동남공정에 손을 뻗히고 있다.
우리의 신선사상은 역사와 함께 불로장생을 바탕으로 한 고유 신앙이다. 일찍 공자는 신선사상에 도취되어 우리나라에 와서 살고 싶다했고, 춘추전국시대의 연나라와 제나라는 우리 고유의 신선사상을 흠모했으며 진시황은 봉래각을 지어 불로장생을 기원했다. 한반도의 삼신산(봉래산-금강산, 방장산-지리산, 영주산-한라산)은 서불이 마치 손바닥 보듯 안 것처럼 1860년 이후 전설(fiction)로 꾸며졌고, 신선사상의 불로장생은 불로초와 불사약으로 바뀌었다.
남해양아리석각 위쪽에는 거대한 바위가 있다. 부소암(扶蘇岩・扶蘇庵)이다. 부소암은 시황제의 맏아들 부소가 간신배의 모함으로 진나라를 탈출, 서불과 합류하여 이곳에 와 여생을 마쳤다하여 붙여진 바위 이름이며 암자 이름이다. 중국 사서에는 부소가 변방에서 기원전 210년 사사(賜死)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2003년 10월 26일 제주도의 서복전시관 개관 이후 제주, 거제, 남해의 서불 관련 학술 심포지엄 및 한‧중‧일 삼국의 서복연구를 위한 협약에서는 남해양아리석각을 서불과차의 유일한 증거물로 삼아 매년 성대하고 다채로운 행사 및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어쩌면 영원히 수수께끼로 남았을, 남해양아리석각의 진상을 밝히려는 집념 하나로 1986년 1월 31일의 사진자료를 판독하며 연구를 이어온 것에 대해 필자는 자부심을 가진다.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대목이 새삼스러워 동양 최고(最古)의 남해 양아리 성좌도석각이 또 하나의 관광자원이 되어 세계인의 각광을 받을 날이 쉬 오기를 염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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