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장! 지금 어디 있소?”
“군청 관광과에 취재 차 들렸다 나오는 길입니다.”
“남정에서 금곡 가는 길에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정말 시원해. 잠시 쉬었다가 가시게.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모여 있는데 정말 정말 좋아.”
안 그래도 잠시 쉴까 했는데 잘 되었다 싶어 문화원과 향교에서 같이 활동하고 있는 김종도 선생님의 부름에 흔쾌히 응했다.
남정마을과 금곡마을 잇는 금곡교 초입에 서 있는 느티나무 그늘 아래에 들어서자 시원한 바람이 서상천을 타고 불어와 망운산을 오르고 있었다. 여수만을 맴돌던 바람이 바닷물의 찬 기운을 품어서 그런지 정말 시원했다.
“올해는 가뭄이 들어 서상천에 물이 별로 없어 그렇지 물만 많으면 다리 위에서 다이빙도 하고 그랬는데 참 아쉬워. 여기가 남해에서는 가장 멋진 자연발생유원지라고 할 수 있지.”
일부러 쌍을 맞추기라도 한 것일까. 할머니 10명, 할아버지 10명이 10쌍을 이루고 있었다.
카메라를 갖다대니 어르신들이 모두 카메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남해신문에 나오는 거냐”며 물어보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모습이 아이들처럼 순진하게 보인 이유는 무었일까.
남정마을 할머니들이 가장 많았지만 금곡, 대정, 서상 등지에서 피서를 온 할아버지들도 절반을 차지했다.
문두심 남정이장은 “우리 마을에는 그다지 유명한 것이 없는데 이 느티나무가 있어 자랑스럽다”며 “이 나무 아래에서 자주 만나다 보니 마을이 화합이 아주 잘 되고 서로 대화하면서 이해를 할 수 있어 아끼고 사랑하게 된다”고 했다.
남정에서 금곡으로 가는 큰 대문, 금곡에서는 남정으로 나오는 큰 대문이기도 한 두 그루 느티나무는 하늘에서 만나 이미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느티나무 아래에서 젊은 시절을 추억하기도 하고 마을일도 의논하는 촌로들의 여유로움에서 우리 젊은이들의 내일을 보았다면 큰 과장일까?
남정(南丁)마을은 조선 중엽 김해 김씨가 맨 먼저 입주해 마을을 이루었다. 한때는 금곡마을과 대정, 서호의 일부를 포함하는 큰 마을이었다. 1961년 금곡(金谷)마을이 분리되어 지금은 작은 마을이 되었다.
진주진관 남해현지에 남정자리(南亭子里)라는 지명이 나오는데 그것은 정자의 남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것이다.
옛날 포구가 있던 홀포 또는 소흘포는 남정의 서북쪽에 있는 지금은 서호마을로 이름이 바뀌었다. 남해읍과 서호를 잇는 길을 예전에는 홀포로 또는 소흘포로라고 불렀으며, 서호마을은 배를 타고 여수로 가는 매우 중요한 항구였다.
망운산에서 연죽을 거쳐 서상에 이르는 서상천은 남정과 금곡을 가로지르는 남해섬의 서쪽에서는 가장 큰 하천이다. 이 서상천을 어머니로 탄생한 들 가운데 있는 유일한 마을이었던 남정은 언덕모, 수발이라고도 불려져 왔다. 그리고 남정마을 서쪽은 염전이 있었지만 지금은 개간되어 옛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가족 같은 분위기가 포근한 정을 이루어내는 전형적인 농촌마을 남정은 교육열 또한 높아 인재가 많은데 특히 교육공무원 출신이 가장 많다. 출향인사들의 마을 사랑 역시 여느 마을보다 뜨거워 길·흉사 때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경로효친의 모범마을로 꼽힌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이야기 하는 도중 막걸리 한 순배가 돌았다. 안주로 준비한 말린 명태포 만큼이나 쭈글쭈글한 손에서 건내는 사랑이 몹시도 따스했던 8월의 첫쨋날 오후는 그렇게 식어갔다.
김성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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