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마산 장수바위

▲장수바위
질마산 중간 부근에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장수바위라고 부른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한 장수가 이곳에 산막을 치고 병졸을 지휘하였는데 이 바위에 기를 꽂아 놓고 앉아서 사방을 경계하면서 한참 정신없이 병졸을 지휘하던 중 현기증이 일어나 바위를 짚었다 한다. 그 후로 이 바위에는 깃발을 꽂았던 터와 장수가 앉았던 터, 손을 짚었던 터가 있고 장수의 발자국과 말의 발자국도 남았다는 전설이 전한다. 장수가 있던 바위라 하여 장수바위라고 한다.

▲남근바위
태고적부터 고두 끝 남근바위(좆바우 끝)라는 말이 있었다. 언포 끝 남근바위가 있던 곳에 3m 정도 되는 바위가 누워 있었는데 태풍 ‘어빙’에 의하여 굴러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아래 부분이 1m 정도, 윗부분이 2m 정도 무게는 약 2톤 정도 되는 바위이다.
고두마을 어떤 노인이 고두 끝에 바위가 없어져 고두마을에 정기가 빠져나간다고 하여 2006년 9월 11일 세웠으나 태풍으로 다시 넘어진 것을 10월 7일 다시 세워 놓았다. 우리 민족은 태양을 숭상하고 불, 남아, 남자의 힘을 상징하는 남근 남아를 선호하였다.
이곳은 창선의 동쪽 돌출부로 태양이 솟아오를 때 앞에 있는 신수도 본동과 대구동 사이에 잘록한 곳에서 해가 뜬다. 이때 시뻘건 태양이 이 바위에 비치면 정말 밤이슬이나 바닷물에 젖은 부분이 빛을 받을 때처럼 한 폭의 그림이나 하나의 형상으로 빛났다. 바위가 없어진 이유는 바위가 산 아래 상단에 있었으나 여기서 바로 앞에 보이는 대방 처녀들이 하도 바람이 나서 밤에 몰래 돌을 넘겨 버렸고 그 돌을 낭장망 하는 사람이 묶어서 어장 닻으로 물에 넣었다는 것이다. 당시 대방이라는 마을에 큰 배도 없었으며, 있다 해도 소구발동기가 있을 때였기에 어느 누가 이곳까지 와서 야밤에 돌을 밧줄로 묶어 넘겼다는 사실은 신빙성이 없는 소리다.
대방이라는 마을에 오래토록 돌배가 건재하였다. 돌배가 접안하기 좋은 곳이라 조판을 걸고 등짐을 하여 돌을 싣고 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때 당시 돌배 아니면 선착장 죽방렴에 돌을 넣을 수 없었다. 돌은 청석으로 잘 깨어지고 썩돌 비슷한 돌도 있었다.
현재 3m정도 되는 돌이 두 동강 난 것이 남근바위로 추정된다. 사람이 움직일 수 있는 돌은 모두 가져가고 사람이 움직일 수 없는 돌만 남아 있다. 당시 물가 큰 돌은 어장주들이 어장돌 한다고 묶어서 닻으로 사용한 것이 사실이나 그렇게 큰 돌은 없었다.

▲아기바위
적량진의 북쪽 3~4리쯤에 있다. 노인들에 의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옛적에 선녀가 이 바위에 내려와서 아기를 낳으려고 하더니 호랑이가 앞으로 다가와서 잡아먹으려고 할 때에 깜짝하는 사이에 석성이 사방으로 선녀를 둘러싸서 화를 면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름을 아기바위라고 하였다.”
위로는 천길 절벽이 있고 아래로는 만발의 창해에 임하였다. 사람의 발자취가 이르기 어려운데도 성이 있고 참호가 있으니 모두 인위적인 것 같다. 성 안에는 또 편석이 있어서 한 사람이 누울 만하고 돌 위에는 진한 피의 흔적이 있어 세상에 전하기로는 출산할 때의 피라고 한다.
바위에서 가느다란 길이 있으나 고적을 찾고자 한다면 반드시 그 몸을 잊은 연후에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아기바위를 혹은 ‘애건’이라고도 하는데 국사봉에서 동쪽으로 뻗은 산자락이 바다에 닿는 부분이 절벽으로 되어 있어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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