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박한 환경 속 지역민의 삶 전설에 깃들어

옛날 마을 정 씨와 류 씨가 심은 90년이 넘은 2그루의 나무와 마을의 수호와 평안을 지켜 온 불명의 돌이 함께 있는 ‘서지등(현재 마을체육근린공원)’.


설천면을 등지고 서있는 산줄기를 따라 면의 중심부인 면소재지에 가까워 질 때쯤이면 만날 수 있는 금음마을에는 일제시대 근대 역사의 흔적과 척박한 환경 속 주민들의 삶이 깃든 전설이 있다.
금음마을에는 일제시대 일본군이 우리나라의 산을 돌며 광물을 앗아간 흔적인 ‘금굴’ 이야기와 흔적 그리고 지금의 금음마을을 있게 한 돌과 나무에 얽힌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금굴’에 대한 이야기는 올해 81세로 출생부터 줄곧 이곳 금음마을을 지키고 있는 이기태 할아버지가 들려줬다.
이 할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할아버지가 5살 무렵, 집 바로 뒷산인 ‘금음산’ 중턱에는 광물을 채굴하는 광부인 일본인 1명이 있었고, 일본인은 한국인 부인과 함께 이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당시 할아버지의 기억으로 산에서는 하루에 6~8번 정도의 “쾅, 쾅” 화약이 터지는 소리가 있은 후, 전체 15m~20m 길이의 굴이 만들어 졌으며, 그 이후에도 일본인이 도굴하는 것을 직접 보기도 했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정확하게 일본인이 채굴해 간 것은 무엇인지 기억엔 없으나 당시 금굴 근처에는 반짝이는 돌들이 많이 있었던 것으로 이 할아버지는 기억하고 있다.
일제시대 일본군이 도굴을 위해 뚫은 금굴의 모습. 현재는 물이 가득 차 있다.

일본인은 산 아래 집에서 아침밥을 먹고 난 후면 항상 산으로 올라갔었고, 도굴은 해방 전인 1943년 이 씨 할아버지가 9살 무렵까지 이어졌다. 그 이후 마을 주민들 사이 ‘금굴’의 존재만 알려진 채 90년 간 방치됐고, 옛날 마을 주민들은 겨울에 땔 나무를 하러 갈 때면 잠깐 쉬어가는 휴식 장소로 금굴을 봐왔다고 한다. 또 이 금굴 앞에는 당시 그 일본인이 휴식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집터와 당시 굴을 파내며 깎아 버려진 불순물들이 남아있는 등 당시 역사적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최근 면의 역사가 담긴 ‘면지’ 증보판을 준비 중인 설천면사무소가 금굴 이야기를 재조명하고, 현재 산책로와 연계시켜 재정비 중에 있다. 현재 금굴은 낮은 지대로 인해 물이 가득 찬 상태여서 물 배출 작업이후에는 약 20m 깊이로 추산되는 금굴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또 금음(金音)마을 지명은 앞선 금굴 이야기처럼 뒷산에서 금을 캐는 소리와 쇠소리가 난다해 ‘쇠음산(金音山)’이란 이름에서 비롯된 한편 옛적부터 선비가 많이 배출돼 말을 탄 글공부하는 사람들이 쉬어간다는 뜻 이외에도 비가 내리지 않으면 농사를 짓기 힘든 척박한 환경이란 뜻에서 ‘말랑이, 몰랑이’라 불렸다고 전해지고있다.
당시 농사를 많이 지었던 마을 주민들이 가뭄이 잦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꿋꿋이 잘 이겨내 온 덕에 오늘의 마을이 있을 수 있었고, 이와 관련해 주민들의 삶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전설도 함께 전해지고 있다.
     
예부터 ‘서지등(현재 마을체육근린공원)’이라고 불린 이곳은 옛날 마을회관도 자리할 정도로 지리가 좋은 명당으로 낮이고 밤이고 마을 주민이 함께 어울리고 두터운 친목을 다지는 휴식처였다. 이 곳에는 마을의 정 씨, 류 씨가 90여년 전 마을의 평안과 화목을 위해 심은 2개의 나무가 마치 쌍둥이 형제처럼 나란하고 올곧이 솟아 아직까지 자리를 지키며 마을 주민을 위한 따뜻한 곳으로 남아있다. 또 이 곳에는 커다란 3개의 불명의 바위가 있는데 옛날부터 내려온 마을의 선대 어르신들의 구전에 따르면 “대국, 천국에서 온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곳에 큰 바위를 써 묘 자리를 만들면 마을에 ‘장군이 난다’는 말에 따라 당시 대국사람들이 화장을 치르고 이곳에 3개의 큰 바위를 옮겨 이 자리에 있게 됐다”고 한다.
앞서 금굴 이야기를 전해준 이기태 할아버지도 “마치 큰 두꺼비 모양처럼 생겨서 어릴 적부터 많은 주역주민들이 앉아 쉬어가며 편안함을 느낀 곳이다. 또 예전 대국사람이 여기에 묘 자리로 만들어 어릴 적 이 바위 아래서 질 좋은 숯을 본적 있으며, 일부 주민들은 숯을 주워가기도 했다”고 말해 이야기에 신빙성을 더했다.
불명의 크고 무거운 3개의 바위 덕분에 현재까지 마을에서는 꾸준히 인재가 배출되어 남해에서는 박사학위를 가장 많은 마을로 불리고 있으며, 대학교수, 면장 등 사회 각 분야에서 활동 중인 사람들도 많다. 또 이 3개의 바위는 90살이 넘은 2그루의 나무와 같은 곳에 위치해 마을 주민의 쉼터 역할을 더해주며 마을주민의 건강을 지켜줘 장수마을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이외에도 금음마을을 둘러 감싸고 있는 금음산에는 호랑이가 머물렀다는 ‘호랑이바위’도 하나의 전설로 내려오고 있어 금음산등산로를 찾는 등산객에게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으며, 인근에는 삼국시대 산성으로 경상남도 기념물 19호로 지정된 ‘대국산성’과 해방역사의 맥을 간직하고 있는 ‘남해3.1운동발상기념탑’ 등이 주요 관광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마을 전설을 이야기해 주신 이기태(81), 김막례(79) 어르신 부부

▲도움 주신 분들- 이기태 할아버지, 김막례 할머니, 김평섭 금음마을 이장, 설천면사무소 이상록 면장, 김원근 부면장
/김인규 기자 kig2486@namhae.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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