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전설은 ‘한국구비문학대계’ 8집 9책에 기록된 전설로 채록자 김승찬과 김경숙은 구연자 정준탁으로부터 들은 구전을 그대로 옮겼다.
남해 전설은 다른 전설이 아이고 조선 말엽에 효자범이라는 범이 한 마리 났어요. 그런데 그거는 내가 전에 우리 아버님 때에 정도 이서로 그 효자범이 생겼는데 그 효자범은 누구냐 이라믄 남해 창성(창선) 그 임진사라고 하는 분이 범이 피더라 이기요. 그래 그 분이 효성이 출중했기 때문에 아바니가 병이 나가지고 무수한 약을 쓰고 불치라.
이라이까네 어디 문의한 결과 어떤 분이 개 천 마리를 묵으면 그 병이 났겠다. 이러니까니 옛날에 그래서 그래 진사 벼슬로 얻는 것인데 진사라 카믄 집안이 가난한 겁니다. 그런 행시 할라 카믄 이러고 보니까니 가난한 집안에서 개 천 마리로, 지금은 개가 소값이 보담도 비싸오마는 옛날에야 헐어믄 개값이라 했어요.
뭣이든지 아무런 물건이라도 팔러 가서러 그 날 말이지 헐키 팔았으믄 개 값이라 했어요. 뭣이든지 아무런 물건이라도 팔러 가서러 그 날 말이지 헐키 팔았으믄 ‘개 값을 팔았다’ 이래 됩니다.
이런 때에도 그 개 천 마리 먹일 재산이 없었더라 이기지요 이래서 그것이 한이 되가지고 항상 일구일성으로 “내가 개 천 마리로 우리 아버지로 몬 해 드리 가지고 우리 아버지로 구해낼 재주가 없구나.” 이래놓고 고심으로 항상 일구일심으로 그래 참산에다 빌고 이랬든 갑십니다.
하루는 산에 나무하러 가니까니 우연히 책이 요만한 것이 하나 바져 있어요. 그래 그 책을 똑 주어가 보이께 아, 둔갑장신하는 이런 책이라. “아! 인자 좋은 머시가 있구나” 해가지고 단지 본 것이 딴거는 아무 것도 안 보고 사람이 범으로 변하는 이 글귀만 봤다 이거지요, 이것을 애아 가지고는 저녁 딱 묵고나믄 말이지 살거시 뒤에다 숨키놓고 짚동새에다가 그 책을 딱 숨키놓고 가서 말이야 몇 마디만고 잘 읽으믄 그만 범이 되는 기라. 그래가 담을 훌터삐니 가지고서 개 한 마리 차고 오는기지.
그럭저럭 해가지고 한 천 마리 중에 말이지 아, 삼분지이나 떡 끄어다 믹이니 나이까니 원총 말이지 이 마누래가 도저히 할 짓이 아인 기, 갔다오믄 그 진사양반이 꼭 옷 한 벌로 바리는기라. 그 마안날 세탁을 해야 되는디, 아, 여자가 할 짓이 아이거든 없는 집안에서 또 있더래도 뭣할낀데 그러나 그 여자는 효성이 없었지예.
이러고 보이께 이 남자가 무슨 짓을 해서 말이지 개 한 마리서도 또 이리 구찮은 일인데 의복까지 전부 이래가 베리가 오는데 부실부실 부실하이 이래 오는데 저녁을 떡 묵고 뒤로 돌아 가거든 그 살그이 얕보이까 뒤 짚똥 속에서 손을 살 넣더니 뮈 쪼그만 책을 하니 내 가지고 착착착착 넘기디 아, 머라머라머라 뮈 알시인께 크다란 범으로 보여 그라더마는 책을 그 속에다 딱 여어 넣고서 그마 담을 힉뜩 넘어서 뛰 가삐리거든. 옳지 싶어서 가고 난 뒤 그 책을 어디 삼키나 놓을 것 아인가. 덜렁 가지고 와 가지고 말이지 그마 딱 사라 삐릿어요.
살고 떡 모른디끼하고 있으이께 남자는 말이지 개로 한 마리 차고 오는데 그때는 마 이 근방에서는 가까운데 얼쭈 다주어다 다리 놓으니까니 멀리 가든 모양이지. 그러이께 범은 하루에 가먼 천리를 가지요. 천리로 갔다 온다고 이렇게 하는데 그 멀리 가서 차가오는 모양이지. 이래 오니까 갖다 떡 붙이놓고 가서 책을 찾으이께 책이 있어야지. 그 짚똥 다 내가지고 하나 하나 낸주에 다빗다 아입니까? 그쾌 디비도 책이 안 나오는 기라.
그러니까 방에 들어 가서로 저거 아바니 병들어 누워 있는 것을 갖다가 물어 내가지고 마당에다가 때기를 쳐 직이삐리고 들어가서 마누라 물어 내 가지고 직이 삐리고 이래 가지고 그 남해를 해치고 댕깃다 이말이야. 이러고 보니까 “아이고 범이 와서 사람을 상온다, 사람을 상온다” 이런데 하나도 묵지는 안 하고 전부 물어만 딱 직이거든 물어서 대기를 쳐서 딱 직이만 놓고 뭐 가고 가고 이래 그로이께 그걸 갖다가 진사범이다 이랬다 말이야.
진사범 소문이 나기로 이런께네 그 머 하동 군수한테다가 여내 남해는 하동에 그때 속해가 있었십니다. 지금은 독군이지마는 그래서 남해군수 되가지고 그때는 충무가 충무가 아니고 그때 지량군(진양군)이 되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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