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학자, 문인 등이 각기 자기주장을 거리낌 없이 논쟁하는 일, 저명한 학자들이 모여 학문이나 사상에 대하여 연구하고 그 결과를 기탄없이 토론하는 것을 뜻한다. 즉 자기의 주장이나 옳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자유롭게 발표하고 이슈로 만들어서 논쟁이나 토론을 벌이는 것을 말한다.
꽤나 유명한 소설가의 표절을 놓고 진위를 가리는 논쟁들이나, 최근 정치권이나 언론, 시민단체 등에서 쏟아지는 상황을 두고 자주 인용되는 성어다. 정치판에서 오가는 논쟁을 두고 ‘백가쟁명식’ 정치구도라고 하는 말도 여기서 유래한다.
경쟁은 우리의 삶을 힘들게 하지만, 살아가는 의욕을 북돋아 주고 열정을 꽃피우게 하는 긍정적 효과를 지닌다. 여러 사람들이 서로 자기주장을 관철하기위해 내세우는 일을 의미하는 백가쟁명은 중국 모택동 정권시절로, 1957년 4월 인민내부의 모순을 처리하기 위해 당원과 비당원을 망라,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비판과 자기비판을 시도하여 공산당원내 팽배한 대중과 유리된 관료주의 분파주의 주관주의를 타파하자는 것이며, 문화혁명기간 중에는 이 운동이 사라졌다가 1976년에 문화혁명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문예학술분야에서 장려되기도 했다.
그 유래를 보면 중국 제(齊)나라 수도인 임치(臨淄:靑州)는 전국시대 굴지의 대도시였다. 이 임치성(산동성) 직문(稷門)은 천하의 학자들이 모여 학문이나 사상에 대하여 연구하고 그 결과를 기탄없이 토론하는 이른바 백가쟁명의 요람이라고 할 수 있다.
직문에는 여러가지 사상과 학술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여러 나라로부터 모여 들었다.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한 맹자(孟子)와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한 순자(荀子)는 시대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 얼굴을 맞댄 일은 없었지만, 같은 시대 여러 학파의 학자들이 이 직문에 모여 매일 자유로운 토론을 벌였다. 사람들은 이것을 가리켜 '백가쟁명'이라 불렀다. 제자백가(諸子百家)로 불리는 각양각색의 사상을 가진 학자들이 다투어 자신의 학문 사상을 주장하고, 상대방의 학문 사상을 논평하는 것이다. 백가쟁명은 자유분위기가 보장되지 않으면 실현할 수 없다. 제나라 위왕(魏王)이나 선왕(宣王)은 직문에 관한, 자유로운 분위기를 절대 보장하고 적극적으로 백가쟁명을 장려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직문의 백가쟁명은 중국의 학문 사상의 황금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토론과 논쟁으로 인하여 학문 사상은 더욱 성숙 발전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냈다. 이런 면에서 제나라 위왕이나 선왕의 공적은 침략당한 토지를 돌려받거나 제나라의 위엄을 널리 천하에 떨친 것보다는, 직문에 학자들을 모아 백가쟁명의 분위기를 보장하고 장려했다는 점을 더 높이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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