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백이정 선생의 학문, 무예 흔적 남아
시대적 인물들의 혼이 깃든 마을

시문마을 전설에 관련된 주요 지명을 마을 항공사진에 표기해뒀다. 

삼동면 시문마을은 옛날 인적도 드문 첩첩산중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많은 선비들이 터를 닦고 학문적 지식을 쌓은 곳이라 하여 옛 이름을 ‘선곡’이라했으며, 학문과 관련한 여러 인물들에 대한 전설이 깃든 곳이다.
정두삼 이장에 따르면 시문마을은 현재 마을 초입인 ‘시문 삼거리’ 인근이 동산으로 선비들이 오두막집을 짓고 학문을 익혔던 터였으며, 선비들이 머물며 생활하며 마을의 기반을 잡았었다고 말한다.
이후 ‘선곡’이란 이름에서 1979년 ‘살문’으로 지명이 바뀌게 됐는데 여기에는 옛 선비들의 학문적 터를 닦아둔 덕분인지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인 성리학 연구자이자 문필가였던 백이정 선생에 얽힌 전설이 이 지명에 연관돼있었다.


‘살문’은 능, 원, 묘, 궁전, 관아 등의 입구에 둥근 기둥 2개와 지붕 없이 붉은 살을 일정 간격으로 이어 박은 문인 ‘홍살문’에서 따온 이름으로 광활한 활터가 현재 마을 부지에 있어 이 같은 이름이 붙여졌고, 활터로 들어가는 입구였던 지금의 시문마을 비석이 세워진 곳에 홍살문이 서 있었다고 한다.  
이곳 활터에는 백이정 선생이 직접 와서 활시위를 당겼다고 전해져 오고 있으며 현재의 ‘시문’으로 지명이 되는데 큰 영향을 끼쳤고, 현재까지 백이정 선생이 활을 쏘던 곳이라는 ‘활재등(현 살문고개)’ 지명과 백이정 선생이 삼을 키우던 곳이란 ‘삼밭골(현 수곡)’ 지명이 그대로 이어져오고 있어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또한 정두삼 이장(64)은 자신이 열일곱 시절, 지역의 80대 어르신께 전해들은 이야기를 꺼내며 “당시 지역 어르신 김 씨 할아버지가 자신의 증조할아버지가 산에서 작은 나무 지팡이를 하나 가지고 내려와 이 곳에 꽂았더니 지금의 정자나무가 생겼다고 전해 들었다”며 “예전부터 선비들과 백이정 선생이 머물러 마을에 학문적, 교육의 혼이 깃들게 됐고, 그 혼들이 올해로 350수가 넘은 이 정자나무에 머물며 마을에 인재가 날 수 있도록 돕는 것 같다”고 한다.
올해로 350수가 되어 마을을 지켜온 정자나무.
마을 전설에 대해 이야기를 전해준 정두삼 이장.

이어 정 이장은 “선대 아버지께 들은 말인데 영지리에서 난음으로 통하는 군도가 있는 부근 ‘선장곡’이라고 불리는 곳은 어떤 사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일제시절 일본군들이 지역에서 인재가 나지 못하도록 불을 놓고, 화약을 터트리는 훼방이 있었다”며 시대적으로 인재가 끊이지 않고 나오고 있다는 것을 반증해주고 있었다.
또 일제시절 일본의 이 같은 공작에도 불구하고, 5공화국 들어 보안사령관을 지낸 최평욱 씨와 대법관을 지낸 김일두 씨가 시문마을 출생으로 이름을 알렸으며 현재까지 마을 출신으로 각 분야에서 전문학자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도 여럿 있다고 설명한다.
이밖에도 정두삼 이장에 따르면 “아직까지 마을 중심에는 350수 된 정자나무가 건재해 있으며, 전체 8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 마을에 17세대 정도가 젊은 청·중년층의 사람들이 들어와 마을에서 문화 예술분야 등 새로운 학문에 도전하는 젊은 생각들이 이어져 오고 있다”고 말했다.    
▲도움주신 분-시문마을 정두삼 이장
/김인규 기자 kig2486@namhae.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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