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마을에는 용이 살았다는 전설이 있는 큰 용소와 작은 용소 2개의 소가 있다. 사진은 작은 용소 모습

 

이동면 금석마을은 용이 살았다는 ‘용소’와 용이 뭍으로 올라와 쉬었던 자리라는 ‘용소버던’의 전설이 남아있는 곳이다.
김덕기 이장과 마을 어르신들에 따르면 금석마을에는 큰 용소와 작은 용소 2개의 소(沼)가 있는데 이 곳에서 살던 용이 물에서 나와 ‘용소버던’이라 불리는 넓은 들판에서 쉬었고 이후 광두마을을 거쳐 용문사 인근 용소마을로 옮겨갔다고 한다.
용이 무슨 이유로 금석마을을 떠나 용소마을로 터를 옮겼는지는 마을 어르신들도 들은 바 없다고 했다. 다만 50~60년 전 마을어르신들이 어릴 때 날이 가물면 군수가 제관이 돼 기우제를 지냈다는 증언으로 보아 비를 부르는 용이 자리를 옮기면서 정작 금석마을에는 물이 귀해졌을 것이라는 짐작은 해볼 수 있다.
또한 약 40년 전 마을 납산계곡 인근에 다정저수지가 조성됐고 현재 아무리 가물어도 마을에 물이 마르지는 않는다는 마을 주민들의 증언을 생각해보면 용이 떠나가면서 일어난 가뭄이라는 재난을 사람의 힘으로 극복한 의지와 뚝심이 있는 마을이라는 점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왼쪽부터 김덕기 이장, 김종수·김기봉·안병홍·하봉묵 어르신 


김 이장과 마을 어르신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용소에 살던 용이 용소를 나와 용소버던(버덩)에 앉아 쉬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용소마을로 옮겨갔고, 이후 갈수기에는 군수가 기우제를 지낼 정도로 물이 귀했으나 다정저수지를 조성해 천재(天災)를 인력(人力)으로 극복했다”는 용의 전설과는 또 다른 스토리텔링이 가능할 듯하다. 용이 마을을 떠날 당시 용소마을이 가물어 그 곳에 비를 내리기위해 옮겨갔는지도 모를 일이다.
용이 살았다는 두 곳의 용소는 수량이 풍부하고 그 풍광이 뛰어나 자연과 잘 어우러지도록 개발할 경우 좋은 물놀이 장소로 각광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김덕기 이장도 큰 용소와 작은 용소 주변을 정비해 물놀이장으로 활용할 복안을 내비쳤다.
김 이장은 1~2년 내 이같은 구상을 현실화해 나갈 생각을 갖고 있으며 또 마을을 찾을 이들을 대비해 이야기거리도 나름 알차게 준비해 두셨더라. 전설이 깃든 용소 주변 냇고랑을 따라 사자 머리 모양을 닮은 ‘사자바위’가 그렇고 바위를 타고 내리는 물줄기가 마치 법당의 좌불을 닮았다 해 이름지은 ‘부처폭포’가 그렇다.

용이 용소에서 나와 앉아 쉬었다는 면적 약 10만㎡의 드넓은 ‘용소버던’


한편 금석마을에는 용소에 얽힌 용의 전설 외에도 마을 인근 약 3만평 가량의 ‘용소버던’이라는 이름의 너른 들이 있으며, 일설에 의하면 이 ‘용소버던’은 조선시대 남해 방위를 위해 말을 타고 사격술을 익히던 세병장터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마을 어르신들의 기억에 세병장터와 관련된 구전은 들을 수 없었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이곳 용소버던에 군인들이 훈련하고 숙영하던 곳으로 쓰이기도 했다고 하니 세병장터였다는 일설에도 무게가 실린다.
이밖에도 금석마을은 경상남도기념물 제62호로 지정된 청동기 시대 지석묘 11기가 남아있는 것으로도 잘알려져 있다. 지석묘 일대에는 청동기시대 민무늬 토기 조각들도 발견되고 있어 청동기 시대 남해지역 문화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도움주신 분-금석마을 김덕기 이장, 김종수·김기봉·안병홍·하봉묵 씨 등 마을주민
/김동설 기자 kds@namhae.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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