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 듀오모 성당

설레이는 이탈리아의 첫 날밤은 냉방과 편의시설이 잘되어 있지 않아 다소 불편했다. 하지만 오래된 것을 소중히 여기고 검소함이 몸에 배어 있는 이탈리아인들의 일상생활을 몸소 체험하며, 편리함에 길들여져 있는 나를 다시 뒤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피렌체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고흐의 작품인 레 베스노 마을과 같은 유럽 시골 풍광이 베니스에서 피렌체로 이동하는 동안 눈 앞에 그림처럼 펼쳐졌다. 끝없이 펼쳐진 밀밭과 간간이 보이는 뾰족 지붕의 농가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향과 같은 포근함을 주는 것 같았다. 
어느덧 버스는 르네상스의 모체인 피렌체에 도착했다. 피렌체의 첫 인상은 화려하고 세련된  도시의 풍광은 아니었다. 마치 내가 버스를 타고 내린 여행객이 아닌 타임머신을 타고 중세 어느 멋진 도시에 도착한 듯 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나의 짧은 문장 실력으로 이 묘한 느낌을 표현하기엔 어려움이 있는 듯했다.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모체다.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단테, 라파엘로, 메디치 가문이 활동했던 곳이기도 하다. 머릿속에서만 그리던 르네상스와 피렌체! 그리고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살았던 곳!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는 피렌체 근교 빈치마을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하지만 다빈치는 뛰어난 재능으로 25세 때 메디치가에 고용되어 ‘수태고지’와 ‘동방박사들의 경배’ 등을 그렸으며, 과학 분야에도 뛰어남을 보였다. 다빈치는 1482년 밀라노 공 로도비코의 초청을 받아 17년 동안 예술가로 활동하였으며, 그의 의뢰로 최대의 걸작 ‘최후의 만찬’을 그렸다.
미켈란젤로(1475~1564)는 아펜니노 산 속에 위치한 마을에서 출생하여 6세 때 어머니를 여의었으며, 13세 때 피렌체의 제일가는 화가 기를란다요의 제자가 되었다가 몇 해 후 메디치가에서 일하게 되었다. 미켈란젤로는 1505년 세계적인 걸작 대리석 조각 ‘다비드’를 완성하였다. 그 후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의뢰로 5년간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 오른쪽에 있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 ‘천지창조’를 그렸으며, 수년에 걸친 작업으로 그의 목은 한쪽으로 기울고 말았다고 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또 다른 천재화가 라파엘로(1483~1520)는 이탈리아 중부 도시 우르비노에서 화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라파엘로는 열 한 살이 되기 전에 부모를 모두 여의었다. 그리고 1508년 로마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의뢰로 바티칸 궁전의 벽화를 그렸으며, 그때 그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되는 ‘아테네 학당’, ‘그리스도의 매장’, ‘삼미상(三美像)’ 등을 제작하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는 비록 불우한 환경에서 태어났지만, 그들을 눈여겨 본 메디치 가문은 물심양면으로 조력가의 역할을 아끼지 않았다. 메디치 가문은 이탈리아의 중부지방 피렌체공화국의 평범한 중산층 가문이었으나 은행업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하며 유럽 16개 도시에 은행을 세우고 교황청 자금의 유통을 맡았다. 그리고 막대한 사재(私財)를 시정(市政)에 투입하고 학예(學藝)를 보호하고 장려하였다. 그들은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프라 안젤리코, 기베르티, 도나텔로 등 수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하였으며 천재 예술가들을 통해 르네상스의 걸작들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4세기경에 만들어진 듀오모 성당(산타크로체) 세례당의 청동문 ‘천국의 문’은 기베르티를 통해 완성시켰다.
나는 작년 서울국립중앙박물관에서 폼페이의 최후와 피렌체의 듀오모 성당(산타크로체)에 있는 기베르티의 작품인 ‘천국의 문’ 전시를 관람한 적이 있었다. 한국에서 본 ‘천국의 문’을 피렌체에서 다시 감상하며 문화적 즐거움이 주는 벅찬 행복감에 한참을 서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김미숙 남해문화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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