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경로당에서 어르신 점심 마련
“건강이 허락하는 한 마을어르신들과 계속 함께 하고파”

“요새 날도 더운데 이열치열이라고 마음 따뜻해지는 미담 하나 취재 좀 해달라”는 제보전화.


그리고 이어지는 말이 “우리 동네에 ‘귀촌천사’가 살고 있네. 그런 사람 또 없네”라며 “꼭 좀 와달라”고 청했다. 사연을 알려온 이는 서면 상남마을 윤봉안 이장이었다.
궁금했다. 귀촌천사의 정체가. 상남마을 윤봉안 이장이 말한 ‘귀촌천사’는 이 마을에 사는 김정애 씨(67세). 원래 남해읍 외금이 고향이니 ‘귀촌(歸村)’이라기보다는 ‘귀향(歸鄕)’이 맞겠다.
남해초등학교를 다녔고 남해여중을 졸업한 뒤 부산으로 거처를 옮겨 젊어서부터 ‘도둑질’ 빼고는 다 해 봤다는 김정애 씨는 5년전 이 곳 상남마을에 새 둥지를 틀었다. 환갑을 갓 넘긴 5년전, 젊어서 한 고생 탓인지 갑자기 큰 병을 앓은 것은 아니지만 건강에 이상이 있다고 느껴 결정한 귀향이었다.
그녀가 어떻게 ‘귀촌 천사’가 됐을까. 상남마을에 둥지를 튼 지 5년여가 지나자 특별할 일 없는 평범한 그녀의 삶에 작은 변화가 시작됐다. 조용하고 한적하기만한 마을에서 특별할 것도, 남다를 것도 없는 일상을 보내던 그녀는 갑자기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런 생각 끝에 뭔가 의미있는 일을 찾던 중 그녀는 마을경로당에 모여 계신 할머니들을 떠올렸다.
대다수 시골마을이 그렇듯 상남마을도 열에 일곱, 여덟 집은 할머니 혼자 사시는 형편이다.  그렇다보니 자연스레 마을경로당이 할머니들의 사랑방이자 생활공간이 됐고 할머니들은 각자 집에서 조금씩 가져온 반찬, 또 밭에서 갓 뜯어온 찬거리를 갖고 점심을 함께 드시고 계셨다. 그녀는 그날부터 마을 할머니들의 점심식사를 손수 준비하고 대접하는 일을 시작했다. 그녀의 일상에 찾아온 작은 변화는 처음 몇 달간은 마을 할머니들 몇 분을 빼고는 마을이장도 모르던 일이었다.
매일 11시면 집을 나서 경로당으로 나와 벌써 자리를 잡고 앉은 할머니들과 잠시나마 말벗을 해 드리고 곧장 그녀는 경로당 한 켠에 마련된 주방으로 몸을 옮긴다. 그리고 쌀을 씻어 밥을 앉치고 손수 이것 저것 반찬을 만들어 점심상을 차린지 벌써 반 년. 작게는 7~8인분에서 많을때는 20인분이 넘는 식사를 준비해야 되니 곧 칠순을 바라보는 그녀에게도 쉽지 않은 일은 분명했다. 젊은 나이에 안 해본 일 없이 다 해 봤다는 그녀의 손끝은 몹시도 야무졌던 모양이다.

아흔을 넘긴 할머니부터 칠순 팔순을 다 넘긴 할머니들 사이에 있다보니 그녀도 적지 않은 나이지만 ‘막내’다. 점심을 먹고 손수 악상을 떠올려 만든 마을 자랑 자작곡을 할머니들과 함께 부르고 때로는 함께 춤도 추고 그렇게 지내다보니 이제는 마을 할머니들이 때로는 친정엄마 같기도, 친언니 같기도 하다는 그녀.
살면서 아이들 키우려고 참 많은 일을 했고 생계를 위해 참 최선을 다해 살았다고 자부하지만 이 일을 시작한 뒤로는 스스로 자신감도 생기고 또 새롭게 용기도 얻게 되더라는 그녀. 칭찬을 받을만한 대단한 일도 아니라며 몇 번이고 인터뷰를 고사하던 그녀는 “내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마을 어르신들과 함께 하고 싶다”고 말했다. ‘밥쟁이’라고 불리건 ‘영양손’이라고 불리건, ‘귀촌천사’로 불리건간에 이제는 마을 할머니들이 가족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란다.
몇 번이고 인터뷰를 고사하던 그녀는 취재 막바지에 나지막히 부탁 하나를 전한다. 혹시 기사가 나오게 되면 뉴질랜드에 있는 막내아들에게 보내줄 수 있겠냐고.
그러면서 혼잣말처럼 되뇌인다. “아들이 엄마가 이렇게 잘 지내고 있다고 알 수 있음 좋겠네요….” 엄마가 작은 일이지만 좋은 일 하는게 먼 타국에서 고생하는 아들에게 좋은 일만 생기도록 덕을 쌓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딸 넷을 낳은 뒤 어렵게 본 막내아들.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겠지만 그녀에게 먼 타국에 있는 아들은 가장 아픈 손가락인가보다. 그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머리 위로 여전히 뜨거운 한낮 햇볕이 쏟아졌지만 그보다 더 뜨거운 모성을 느껴서일까. 그 햇볕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정영식 기자 jys23@namhae.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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