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는 뜻이다. 앵강만 언덕에 있는 홍현1리와 설흘산 골짜기에 있는 홍현2리로 분동되었다. 무지개마을은 홍현2리이다.
선구(仙區)로 개칭되었다.마을의 전통놀이인 선구줄끗기가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되었다.선구줄끗기는 일제강점기 때 문화말살정책으로 사라졌다가 1978년 복원되었다.

▲선구마을
마을 뒤 산봉우리에는 옥녀가 하강하여 놀다가 승천하고 잣나무숲(柏林)에는 신선이 살았다고 하여 선구(仙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옛날 감찰선생이라는 분이 마을을 지나다가 노숙을 하게 되었다. 그 때 모기가 극성을 부려 모기 입에 부적을 붙여 쫓아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도 이 마을에는 모기가 적다고 한다.
선구마을 서북쪽 웃곡에 있는 수령 370년이 넘는 팽나무는 마을의 당산나무이다. 해방 후 호열자(콜레라)가 창궐하던 때에 마을동수가 꿈을 꾸었다. 남해섬을 휩쓸던 호열자 귀신들은 선구 아랫모 진입로로 들어오려고 했다. 그 때 언덕 위에서 마을을 굽어보던 당산나무 신이 홀연히 나타나 호열자 귀신들에게 호통을 쳤다.
“네 이놈들 어찌 내가 사는 마을을 침범하려 하느냐. 썩 물러가지 못할까!”
호열자 귀신들은 당산나무 신의 호통에 감히 마을을 침범하지 못하고 모두 돌아갔다. 동수는 꿈에서 깨었다. 너무나 생생한 꿈이라 마을 사람들에게 꿈이야기를 하고 호열자가 마을에 전염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고 한다. 당시 이웃마을인 항촌에는 호열자로 많은 희생을 치렀으나 선구에는 한 사람도 발병하지 않아 모두들 당산나무의 은덕으로 여겼다고 한다.

▲장수방(將帥房)
아득한 옛날에 어느 장수(將帥)가 남면 석교리 옆 월포의 서남쪽 해변에 있는 바위를 차고 뛰어 올라 앵강바다 건너편에 있는 금산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유지(遺趾), 즉 남아 있는 발자국의 길이가 약 40㎝, 너비 25㎝ 되는 큰 왼발자국과 바다를 보고 뛰었다는 무릎 터가 남아 있다. 이상하게도 큰 두 바위 사이는 물이 잠겨져 있으며 길이 10m 되는 그 벽면에는 이상하게도 사람의 진열 같은 조각이 있는데 그림도 같고 암면 이 자연의 조화로 철문된 것도 보이고 있다. ‘방’은 ‘바위’의 사투리인 ‘바우’가 변형된 말이다.

▲무지개를 타고 돌아온 아내
옛날 홍현리 무지개마을에는 금슬 좋기로 유명한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남편은 마을 골짜기에 무지개가 곱게 피어나자 그 무지개를 따라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따라가도 무지개는 가까워지지 않았다. 저녁이 이슥할 때까지 무지개를 따라 깊은 골짜기로 들어간 남편은 길을 잃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아무리 길을 찾아도 방향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남편은 집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딸 하나를 데리고 남편이 돌아오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던 아내는 무지개만 뜨면 남편을 부르며 무지개를 향해 걷다 지쳐 쓰러지곤 하였다. 해가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위하여 남편이 사라진 곳 부근의 바위에서 무사귀환을 비는 아내에게 산신령이 나타나 말했다.
“당신의 남편은 서쪽 골짜기로 향해 무지개를 따라갔으니 그 쪽을 찾아보게.”
아내는 산신령의 말을 믿고 끝도 없는 골짜기를 헤맸지만 남편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골짜기를 헤매고 있을 때 갑자기 무지개가 피어올랐다. 지칠대로 지친 아내는 무지개를 타고 돌아오고 말았다. 그 뒤부터 이 마을 이름을 ‘무지개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저작권자 © 남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