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익 목사는 제13회 총회장뿐만 아니라 해방 후 1947년 제33회와 1948년 제34회 총회장을 연이어 역임하였다. 이른바 3선 총회장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는데, 이는 세계 다른 나라의 기독교 역사에도 없는 일이다. 이자익 목사의 3선 총회장 경력은 우선 신사참배에 참여하지 않고 일제를 지낸 결과에 대한 선물이었다. 더 중요한 이유는 그가 뛰어난 행정가였고 법과 원칙에 의하여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사심 없이 회의를 진행하였던 결과였다. 이자익 목사가 총회의 법통으로 알려지게 된 최초의 사건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그는 13회 총회장으로 사회를 보던 1924년 총회에서 아래와 같은 결의를 통과시켰다.
“금후로는 총회 총대가 폐회 전에 특별한 사고가 있으면 허락을 받고 행동을 할 일이며, 허락 없이 마음대로 행동할 경우는 여비를 지불하지 않기로 하며, 총회 허락 없이 조퇴하는 총대는 다시 노회에서 총대로 선출하지 않기로 동의가 가결하다.”(제13회 총회록 47쪽)
총회 총대들이 회의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한 엄격한 원칙을 적용한 결의였다. 이는 이자익 목사 외에는 아무도 결의할 수 없었던 단호한 조치였다. 이 결의가 지금도 버젓이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도 총회는 첫날만 지나면 자리를 많이 비우는 나쁜 버릇이 사라지지 않고 있으며, 이를 제재할 수 있는 총회장도 없다고 한다.
이자익 목사는 세 번의 총회장뿐만 아니라 전북노회장(1919-20), 경남노회장(1927-29), 대전노회장(1952) 등 삼남의 모든 지역에서 노회장을 역임하는 경이로운 기록을 남겼다. 그는 이러한 건전한 법통의 정신으로 당시 시끄러웠던 마산 문창교회 사건을 해결하고, 6년간 분규로 몸살을 앓던 웅천교회(주기철 목사의 모교회)를 화해시키기도 하였다.
이자익 목사는 해방 후 친구 목사인 함태영 부통령으로부터 자유당 내각의 입각을 권유받았으나 거절하고 시골 목회자의 길을 지켰는데, 이 사실은 그의 행정력이 나라 살림을 맡을 만큼 대단하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또한 법과 원칙에 밝은 이자익 목사는 1953년 제38회 총회에서 헌법을 개정하는 개정위원회의 위원장직을 맡아 총회 헌법을 전면 개정하였고, 이는 오늘날 장로교 총회 헌법의 기초와 근간이 되었다.
이자익 목사는 대전신학교(現 대전신학대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을 역임하였다. 교육을 받지 못하였던 그가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학교를 세우게 된 동기는 조덕삼 장로의 영향이 컸다. 일찍이 조덕삼 장로는 1906년 금산교회 내에 유광학교를 설립하였다. 이때가 을사늑약 바로 이듬해였는데, 조덕삼은 민족을 구하는 길이 교육에 있다고 믿었다. 유광학교에서는 한글과 우리나라 역사를 가르치고 매일 아침 예배를 드렸다. 후에 일제의 박해가 시작되고 신사참배가 강요될 때 조덕삼 장로의 아들로 학교장을 맡고 있던 조영호 집사는 일제에 맞서 아예 학교를 자진 폐교시키고 말았다. 이자익 목사의 신사참배 반대와 교육에 대한 의지는 조덕삼 장로와 그 아들 조영호 교장의 영향이라고 말할 수 있고, 학교에서의 교육을 받지 못했던 자신의 경험도 한 몫을 하였다.
이자익 목사는 곧 대전신학교 교장 직을 사퇴하고 원래의 목회지였던 전북 원평으로 낙향하였다. 그리고 1958년 10월 7일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셨다.
이 모든 사실은 일제와 해방공간의 혼란기에 이자익 목사가 꼭 필요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오늘날 법을 외치는 사람은 많으나 사리사욕에 치우치고 정치적 편가르기에 편승하여 중심에서 치우치는 일이 다반사이고, 법과 원칙이 서지 못하여 고소와 고발 사건이 교회 밖의 법정으로 비화되고 있다. 이자익 목사의 역할이 그리워지는 때이다.
나는 기독교 신자는 아니다. 하지만 이자익 목사의 일생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이다. 이자익 목사가 남해에서 태어나고 남해에서 자라났다는 사실이 자랑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가난하게 태어났지만 스스로의 노력으로 가난을 극복하고 불의와 권력을 멀리했으며 신의를 소중히 여겼고 도움이 필요한 곳이나 분쟁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돕고 해결했던 그런 삶의 자세를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이나 우리 후손들은 배워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 글이 이자익 목사의 삶을 보다 자세하게 밝히고 조명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끝>
/장원도 부산 향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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