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을 돌같이 보라’, ‘지나친 욕심을 자제하라’, ‘대의(大義)를 위해서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돌보지 않는다’는 의미로, 조선전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성현(成俔)의 수필집 용재총화에서 전래됐다. 용재총화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성종때까지의 풍속 지리 역사 음악 인물 설화 등 문화전반을 다루고 있어 민속학이나 구비문학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견금여석’은 고려의 명장(名將)이자 충신인 최영(崔瑩, 시중<侍中>)장군의 아버지인 최옹(崔壅)이 아들에게 훈계(訓戒)한 유명한 내용이다.
최영이 16세가 되던 해 부친 최옹은 아들에게 ‘여당견금여석(汝當見金如石)’, ‘아들아! 너는 이후에 황금을 보거든 마땅히 돌같이 생각해야 한다’라고 했고 이 말을 들은 최영은 아버지의 말씀을 한시도 잊지 않기 위해 비단에 ‘견금여석(見金如石)’을 써 가슴에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또한 최영은 ‘복식검약 누지공핍(服食儉約 屢至空乏)’이라며 궁핍해 보일 정도로 검소하게 생활했다.
최영은 평생 장군, 재상(宰相) 등 높은 반열에 올랐지만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거나 탐욕을 부린 일이 없었다.
최영 장군은 ‘나는 평생 살아오면서 아버지의 교훈을 명심하여 절대로 재물을 탐내는 일이 없다. 내 말이 사실이라면 나의 무덤에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유언을 했을 만큼, 자기 관리에 철저했다고 한다.
당시 재상들 사이에는 서로 돌아가며 집으로 초대 하여, 바둑을 두며 오찬을 하는 일이 있었는데 서로 다투어 진수성찬을 마련하여 누가 더 사치스럽게 잘 차렸는지를 뽐내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러다 최영이 대접할 차례가 되었는데 점심때를 훨씬 지나서도 음식을 내놓지 않다 저녁 무렵이 다 돼서야 상을 내놓았다. 그렇게 나온 상에 오른 것이라곤 잡곡밥에 나물 반찬이 전부였다. 평소 최영 장군이 먹던 상차림 그대로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현대에 들어서 ‘견금여석’은 1960~70년대 국세청에서 조사공무원들에게 사명감을 고취시키기 위해 제작해 배부한 가방에도 새겨져 있었는데 이는 이들 공무원들의 청렴의식을 각인시키기 위한 차원이었다. 청렴하지 않고서는 믿음과 신뢰를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공직자와 권력층에 있는 이들이 ‘견금여석’, ‘황금보기를 돌 같이 하라’는 이 말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기를 바란다.
저작권자 © 남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