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 무리 속에 끼여 있는 한 마리의 학’이란 뜻으로, 많은 사람 가운데 특별히 뛰어난 인물을 말한다. ‘군계일학’의 유래는 중국 진서(晉書) 혜소전(蕙紹傳)에, 위진(魏晉)시대 죽림칠현(竹林七賢)으로 불리는 일곱 명의 선비의 일화에서 비롯됐다.
이들은 지금의 하남성 북동부에 있는 죽림에 모여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세상공명을 뜬구름 같이 생각하는 허무사상을 바탕으로 담론을 즐겨 가졌다. 그런데 위(魏)나라 때 죽림칠현 중, 중산대부(中散大夫)로 있던 혜강이 억울한 죄를 뒤집어쓰고 처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그 때 혜강에게는 나이 열 살 밖에 안 되는 아들 혜소가 있었다. 혜강은 아들 혜소의 손을 잡고 “슬퍼 말아라. 오늘 내가 죽는다해도 너는 의지할 곳 없는 고아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고 혜소는 아버지인 혜강이 처형된 후 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며 학문에 더욱 정진했다.
혜소가 성장하자 죽림칠현의 한 사람인 중신(重臣) 산도가 그를 무제(武帝:위나라를 멸망시키고 진나라를 세운 사마염)에게 천거하며 “폐하! 서경(書經)의 강고편(康誥篇)에는 아비의 죄는 아들에게 미치지 않는다고 되어있습니다. 비록 혜소는 혜강의 아들이나 그 지혜나 슬기, 총명함이 빼어난 인물이니 유능한 그를 비서랑으로 기용하시오소서”라고 고하자 무제는 “경이 천거한 이라면 비서승을 시켜도 좋다”라며 혜소를 비서랑보다 한 단계 높은 비서승에 앉혔다.
혜소가 처음 낙양에 도착해 입궐하던 날 많은 이들이 감격해하며 군중에 섞인 죽림칠현의 한 사람인 왕융에게 말하기를 “구름같이 모인 군중으로 혼잡함에도 혜소의 드높은 기개와 혈기는 마치 ‘닭의 무리 속에 우뚝 선 한 마리 학’처럼 보였다”고 하자 왕융은 만면에 미소를 띠며 “그대는 혜소의 아버지를 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그는 혜소보다 더 훌륭한 이였다네”라고 했다.
비록 아버지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처형을 당하는 아픔을 겪었지만 죽림칠현의 선비들의 도움으로 혜소는 승승장구해 태수(太守)를 거쳐 대중(侍中:문하성장관)에 올라 황제를 가까이에서 모시게 되었다.
그러나 반란군에 의해 황제의 친위부대마저 붕괴돼 혜소는 목숨을 걸고 황제를 몸으로 호위하며 맞섰으나 철퇴를 맞고 쓰러지고 말았다. 당시 황제의 어의(御衣)에는 해소의 피로 얼룩이 졌다. 혜소의 죽음으로 황제는 위기를 모면했으나 황제는 그의 죽음을 통곡하며 핏자국을 쓸어 눈물지었다. 군계일학이란 그런 혜소의 일화에서 유래돼 ‘닭 무리에 끼인 한 마리의 학’처럼 뭇사람 중 유난히 뛰어난 인물을 비유할 때 쓰이는 표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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