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잔 밑이 어둡다’, 곧 가까이에서 일어난 일을 오히려 잘 모를 때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어떤 물건을 옆에 두고도 찾지 못할 때 많이 사용하는데,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어리석음을 비유할 때 그리고 가까이 있는 것을 못 보면서 멀리 있는 것만 보려고 하는 과욕을 빗댄 것으로도 해석된다.
요즈음에야 전등이 천장 위에 있어서 그림자를 만들지 못하지만 옛날의 등잔은 위와 옆을 밝히고 등잔 아래는 등잔 받침에 가려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에도 등잔불을 썼으니 그 때를 기억하는 노령의 독자들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등하불명’이란 고사성어는 현대를 사는 이들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가장 소중한 것은 가까이 있는데도 너무도 멀리서 찾으려고 애를 쓴다던가, 내 손안에 있는 행복을 찾으려 하지 않고 늘 긴장과 불안 속에서 잡히지 않는 행복을 잡으려고 헐떡인다.
이런 우화도 있다. 맑고 깨끗한 시냇물이 흐르고, 향기로운 꽃들이 만발한 초원에 어미말(馬)과 망아지가 있었다. 행복하고 풍요로운 생활을 위한 모든 환경을 갖추고 있었는데도 망아지는 늘 투정을 부렸다. 게으르고 불평이 많은 망아지는 늘 그랬듯 어미에게 “이 초원의 풀은 맛도 없고 시냇물도 맑지 않아요. 최악이에요. 몸도 아픈 것이 이 곳의 공기도 칙칙해서 그런거 같아요”라고 투정을 부렸다.
어미말은 망아지의 투정에 잠시 생각에 잠긴 뒤 “네 말을 듣고 보니 네 건강과 직결된 중요한 문제로구나. 하루빨리 떠나자꾸나”하며 초원을 떠나 고산지대로 거처를 옮겼다.
초원만 벗어나면 모든 것이 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고산지대엔 풀은커녕 배를 채울만한 어떤 것도 찾을 수 없었다. 허기에 지쳐 고픈 배를 움켜지고 잠을 청해야 했다. 하루도 채 견디지 못한 어미말과 망아지는 날이 어둑해졌음에도 다시 원래 살던 초원으로 돌아왔다. 망아지는 정신없이 풀을 뜯어 주린 배를 채웠고, 그곳이 자신이 살던 초원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우리 그냥 여기서 살아요. 어디를 가도 이만한 곳은 없을 거에요”라고 신이 나서 말했다. 어느새 날은 밝았고 그제서야 이전에 살던 초원으로 돌아온 것을 깨달았다.
삶의 진정한 행복은 단맛과 쓴맛을 본 후에야 제대로 느낄 수 있다고 했던가? 가까운 곳에 이미 행복이 있는데도 등잔 밑 어둠에 갇힌 것처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곱씹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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