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문턱에서 겨울을 보내는 것이 아쉬운 듯 아침저녁으로 봄추위가 장독을 깨는 요즘이다.
다가오는 봄을 시샘하는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지난 1일 우리는 1919년 ‘대한독립만세’ 소리로 한반도를 뒤덮었던 3.1 독립운동을 기리는 기념식을 갖고 독립운동 선열의 정신과 넋을 기리는 시간을 가졌다.
정부 주도의 기념식과 함께 각 지자체 단위로 또 각 지역별 독립운동 기념사업회 주최로 전국이 97년전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염원했다. 일제의 총칼에 맞섰던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은 그대로일지 몰라도 후손들에게는 97년전 그날의 열기는 온데 간데없이 관심이 요즘 봄추위를 닮은 듯 쌀쌀하기만 한 것 같아 아쉽기만 하다.
지난해 광복 70주년을 맞아 한 언론매체가 독립운동가와 후손 1천여명을 조사한 결과 월 개인소득 200만원 미만인 이들이 네 명 중 세 명 꼴인 75.2%에 달했고 50만원도 채 못되는 이들이 10.3%나 된다는 소식은 탄식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친일하면 자자손손 떵떵 거리며 살지만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했던 한 독립유공자 후손의 푸념은 더더욱 가슴을 후빈다. 지난해 광복 70주년을 맞아 개봉해 흥행을 몰고 왔던 영화 ‘암살’ 속 배역인 ‘속사포’가 “독립운동도 돈이 있어야 하는 거지”라고 했던 것은 아마도 차가운 땅 속에 몸을 뉘인 선열들이 후세에 예우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현실을 일갈한 내용으로 들릴 정도다.
그런 가운데 우리 지역에서도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 잔혹한 일제에 맞서 나라의 독립을 외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애국지사들이 있음에도 아직 그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고 잊혀져 가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본지가 향토사학자 정의연 선생과 독립유공자 후손들을 대상으로 취재한 이번호 본지 보도에 따르면 남해군지에 독립운동가로 기록된 최영기, 하준천, 하석우, 김일문 선생 등은 독립만세운동 100주년을 눈 앞에 두고 있는 지금까지도 국가가 인정한 독립유공자로는 인정받고 있지 못하다.
국가보훈처 집계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한 사람은 20만여명 내외가 될 것으로 추정되나 국가로부터 유공자로 인정된 이들은 불과 1만4천여명인 점을 감안하면 남해군의 상황도 전국적인 상황에서 별반 큰 차이를 보이고 있지는 않다.
삼일절 기념행사를 거창하게 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정작 후손들이 해야 할 중요한 책무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전언한 것과 같이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대체적인 상황을 고려하면 현재의 독립유공자 증빙을 후손이 하기는 사실상 쉽지 않고 군내에서는 향토사학계에서 이들을 재조명하고 업적을 남기려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고는 있으나 이마저도 쉽지는 않아 보인다.
물론 유공자 현양이나 독립운동사를 정립하는 책무는 국가가 나서야 할 일이나 지역의 독립운동사를 발굴해 정리하고 선열들의 애국 충정의 넋을 기리는 일에는 지자체의 관심도 기울어져야 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했던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을 되새기며 남해의 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 독립운동사를 정비하는 일에 남해군과 관련기관들의 관심이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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