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준천·하석우 선생 등 미지정 독립유공자 다수 존재
지역사회, “독립운동가 재조명 및 정신계승 절실하다”

3.1운동이 거행됐던 1919년, 남해군에서도 같은 해 4월 3일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일었다. 남해군지 기록에 따르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이예모 선생을 비롯한 수많은 군민들이 만세운동에 동참했으며, 이를 무력으로 진압한 일본군과 경찰의 총칼에 사상자가 발생하고 23명이 체포·연행된 바 있다.
정부는 ‘국가유공자예우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조선 독립에 기여한 애국지사들의 정신을 기리고 있으며 우리 남해군에서도 윤병호 선생과 강한문 선생, 이예모 선생 등 27명의 애국지사들이 독립유공자로 지정, 예우를 받고 있다.
그러나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사실이 있음에도 그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남해의 애국지사들이 지금도 다수 있다. 군지에 기록된 남해군 독립운동가들 가운데 최영기(崔永璣·1891~미상), 하준천(河準千·1897~1963), 하석우(河錫宇·1909~미상), 김일문(미상) 선생 등이 3.1만세운동 100주년을 눈앞에 둔 지금까지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잊혀진 독립운동가들을 재조명하고 그들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범 군민적 관심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지역 내에서 일고 있다.
남해역사연구회 정의연 회장은 “우리군 독립운동가들을 재조명해 독립유공자로 등재토록 하는 것은 남해군과 남해군민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며 “민간이 나서 행하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남해군 차원의 관심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하준천 선생

정 회장은 여러 미등재 독립유공자 가운데서도 하준천 선생에 대한 재조명 필요성을 힘주어 말했다. 그는 “하준천 선생은 진즉에 독립유공자로 지정해 그 공적을 기렸어야 마땅한 인물”이라며 “선생은 교육자로서 학생들에게 독립운동과 3.1운동의 정신을 심기위해 헌신한 애국지사”라고 전했다.
정의연 회장에 따르면 하준천 선생은 1919년 4월 4일 남해읍장터에서 만세운동을 펼쳤으며 설천보통학교에 재직 중이던 1923년 학생들에게 조국의 혼을 불어넣기 위해 학도가를 작사·작곡해 부르도록 했다. 선생의 학도가는 “화려강산, 동반도는 우리의 조국이요, 단군자손 배달족은 우리의 동포이다(후략)”라는 가사를 담고 있다. 또한 하준천 선생은 1940년 남해 덕신국민학교 건립에 크게 기여해, 덕신초등학교가 폐교된 지금도 학교입구에 공적비가 남아있다.
구 덕신초등학교 입구에 세워진 하준천  선생 공적비

하준천 선생 추도회
하준천 선생과 함께 남해군지에 기록된 하석우 선생은 하준천 선생의 조카이며 지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 독립유공자 하준호(河準互) 선생의 아들이다. 하준호 선생과 하준천 선생은 형제간이다.
하석우 선생의 아들인 부산교육대학교 하윤수 총장은 부친 하석우 선생의 독립운동 관련 자료를 모아 지난 2007년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지정을 신청했으나 증거부족을 이유로 지정되지 못했다. 당시 하석우 선생에 대한 재판 판결문이나 수감기록 같은 뚜렷한 독립운동 관련 물증이 없기 때문이다. 이후 하 총장은 부친 하석우 선생의 명예회복을 위해 지속적으로 독립유공자 지정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하석우 선생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국가보훈처 심사가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윤수 총장에 따르면 하석우 선생은 10세의 어린 몸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던 부친(하준호)을 적극적으로 도왔으며 1919년 4월 6일 부친이 피검되는 것을 보고 비분강해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다 일본 헌병의 총탄에 오른쪽 발목 복사뼈를 관통 당해 평생 불구의 몸으로 살았다.
하윤수 총장은 “부친과 조부 2대에 걸쳐 독립운동에 헌신한 것은 비슷한 사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이라며 “독립정신은 자주·애국정신이며 보물섬 남해가 살아가야할 정신적 가치이다. 이에 잊혀진 독립운동가들을 재조명해 독립운동의 역사가 옳게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남해군은 지역 독립운동가들의 재조명 작업에 앞장서야하며 정부와 각 지자체는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이 홀대받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신경 써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준천·하석우 선생 이외에 최영기 선생은 지난 1915년 3월 만주 길림성에 한인 덕성학교를 창설하고 기미년 8월 북로군정서 상해임정 선전 연락책으로 활약했다. 군자금 모금을 위해 시베리아로 파견됐다가 1945년 연합군 스파이 및 한인독립단 대표라는 죄명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대기하던 중 연합군 폭격으로 탈옥했다. 또한 김일문 선생은 1919년 9월 남해청년회를 조직해 독립정신을 고취했고 양명·고현·하일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불온사상자로 지목돼 면직됐다.
한편 국가보훈처 자료에 따르면 최봉기(崔鳳基·1903~1980), 정성수(丁性洙·1914~1935) 선생은 건국포장(2005년)과 대통령표창(2011년)이 각각 추서된 남해의 독립유공자이나 남해군지 독립유공자 명단에 포함돼 있지는 않아 군내 독립유공자 관련 사료의 정비작업도 잇따라야 할 것으로 보인다.
/김동설 기자 kds@namhae.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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