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산(巨山) 김영삼 전 대통령은 2번째 크기의 섬 거제도, 그곳도 남해도처럼 조선시대의 유배인물들이 고통 받았던 이름난 섬에서 태어났다. 숙종 왕 때, 노론파 수장 송시열도 그곳에 귀향 갔고, 같은 파 김만중은 남해로 귀향 왔었다. 왕정시대 때 멸시받던 섬사람, 어부의 아들 김영삼은 대통령이 되기까지 그의 삶의 철학은 유배인물들의 정의와 기개, 부정에 투쟁정신을 이어받은 것이 아니었던가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많은 정치인들 중에는 정치권력을 악용하여 개인적 치부를 했고, 당파싸움과 지역편파를 하면서 국민을 위한 진정한 정치를 하지 못 했다. 그런 와중에도 사욕을 멀리하고, 민주화체제를 위하여 일생의 삶을 살아온 인간 김영삼, 살벌한 군정(軍政)의 독재체제에 신체의 고통, 감옥의 삶, 연금의 삶, 단식투쟁 등으로 민주주의의 가치를 국민들에게 인식하게 한 상징적 인물이라 하겠다. 독재정치와 공산주의사상, 북의 적화정치에는 한치도 설 수 없게 정치생명을 걸고 싸워온 정치 투사이기도 했다. 거산(巨山)이란 호를 달고, 거산답게 대도무문이란 정치철학을 선언하여 많은 정치 후배들을 키우고, 말년에는 그들의 정치 언행을 지켜보고 있었다.
 언론지상이 밝히고 있는 거산의 대통령 시절, 정치 행적을 검토해 본다. 잘했다고 평가한 데는 4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전두환 정권을 보호한 군부세력(하나회)을 해체한 것이다. 그리고 전두환 정권이 임명한 참모총장, 각 군 사령관, 군단장과 사단장까지 해임시키고, 문민정치체제를 구축하여, 군인은 오직 국방에만 전념하게 했다. 그 둘은 고위 공무원과 국회의원의 재산등록제를 실시하여 권력형 축재의 길을 차단하게 했다. 그리고 금융실명제를 도입하여 지하경제 팽창을 억제하게 한 것이다. 그 셋은 그의 경제정책의 미숙으로 외화 보유 위기를 맞아, IMF의 지원을 받아야 할 시점, 김대중 야당의 반대로 노동개혁 법을 개정하지 못 했던 그 법을 개혁하여 IMF 지원을 받아, 국가 재정파탄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게 했다. 그 넷은 여야 3 당을 합당하여 정권을 안정하게 하는데 투쟁적 야당 당수의 머리를 숙인 점이다. 그는 말하기를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에 들어갔다"라고 말했다. 야당으로 계속 남아 아무리 큰 소리 외쳐도 그의 정치와 정책을 펼칠 수 없다면 나라만 불안하게 한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머리 숙여 여야가 화합하는 자세도 보여준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말년에 후배 정치인들에게 “나의 시대는 투쟁이었지만, 여러분의 시대는 화합”이라고 당부하셨다. 
 거산의 대통령 재임기에 실패한 정책도 있었다. 그것은 시장개방을 충분한 준비 없이 서둘러 개방하여 국내 경제를 어렵게 한 것이다. 즉, OECD 회원국으로 가입하여, 후진국이 선진국 대열에 빨리 들어가 부자 행세를 하는 나라로 등장한 것이다. 그렇게 하니까 "우루과이 라운드”라는 제도에 가입하여 우리나라 시장에 외국산 농산물이 들어오게 하였고, 금융시장도 개방하여 은행과 기업들이 외화차입을 다투어하게 되어, 외국에 투자를 늘렸다. 경기가 나빠지자 외화 수입보다 지출액이 증가되어 외화가 부도 나, IMF를 맞게 된 것이다. 바통을 이어받은 김대중 정권은 은행, 건전한 기업, 부실 대기업 등을 외자에 팔게 하고, 증권시장을 더 개방하니 우리 경제는 실속 없는 경제로 추락한 것이다.
거산이 세상을 떠난 이 시점에 그의 정치 후배들이 현재의 우리나라 정치계에 중추적 자리를 잡고 있다. 이들은 거산이 남긴 깨끗한 정치와 생활, 민주주의 가치를 깊이 인식하고, 반성할 점, 따를 점, 나아갈 점을 숙고하고 실천할 자세를 가져야 한다. 폭력 시대에 비폭력으로 나라를 안정시킨 그의 인품, 신념은 현대사의 기록에 남을 것이며, 우리 모두는 애도의 마음과 그분이 남긴 가치를 교훈으로 받아야 할 것이다.

/논설위원 농학박사 강    태    경
전 계명대학교 사회과학대학학장
보물섬남해포럼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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