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걷이로 바빴던 일손이 조금 더뎌질 즈음, 오랜만에 인근 하동과 순천시, 여수시를 둘러볼 기회가 생겨 다녀오게 됐다. 일도 있고 이왕 나선 김에 바람도 쐴 겸 했던 ‘나들이’는 개인적으로는 좋은 구경이었지만 막상 다녀온 뒤 가슴 속에는 ‘화’인지 ‘실망’인지 모를 감정으로 복잡했다. 나들이 후 잠을 설친 날이 여러 날이다. 이같은 즐겁지 않은 자괴감이 비단 혼자만의 생각은 아닌 듯해 어렵게 다시 펜을 들었다.
예전에는 보지도 못했던 인근 지역의 변화와 발전된 모습들은 과거 내가 알던 하동이나 순천시, 여수시와는 많이 달라졌다. 케이블카, 레일 바이크, 여수세계엑스포장, 새롭게 단장돼 국내외를 막론하고 대규모 행사가 열리고 있는 순천정원박람회장과 순천만 갈대밭, 사람으로 북적대는 전통시장,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 잘 갖춰진 시설들과 끊임없이 북적이는 인파들을 보며 ‘참…많이도 변하고, 정말 많이 발전했구나’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의 이런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저녁 8시면 길가에 오가는 이를 손에 꼽을 정도인 남해읍의 모습, 면단위로 가는 길에는 가로등조차 없어 암흑천지로 변하는 고향 남해의 모습을 생각하니 이유모를 분노와 실망감, 자괴감에 연신 한숨만 나온다. 갈수록 내 고향 남해는 정말 큰일이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아는 이들은 아는 얘기지만 필자는 몇 년전 암 선고를 받고 현재 투병 중이다. ‘건강을 잃는 것은 세상을 다 잃은 것이다’라는 말을 절감하며 그간 했던 사회활동도 줄이고 한때는 지역신문을 포함해 지방·중앙일간지까지 정독하며 내 나름의 ‘세상공부’를 하던 때도 있었지만 건강이 안 좋아진 이후로는 이마저도 조금 멀리해 왔다.
요근래 군정과 관련해 주변 지인들이나 과거부터 뜻을 같이 해온 이들의 걱정섞인 말들이 전해지면서 다시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조금씩 갖기 시작했다. 비록 자리는 떴으나 과거 한때나마 적을 뒀던 곳이니 군의회 소식에 더욱 관심이 가는게 사실이다.
앞서 얘기한 암울한 고향 남해의 모습을 변화시키기 위해 힘을 합해 달려도 시원찮을 판국에 신문지상에서 연일 들려오는 소리는 객관적 근거도 없이 온갖 ‘말’만 조합한 의혹과 군의회의 추경예산 삭감소식, 의사일정까지 변경하고 의안처리도 못한 상황에서 백두산 관광에 나선 이야기, 이리 따지고 저리 따져도 도통 이해하기 힘든 군의원들의 기자회견 강행 소식 등등이다. 특히나 확인도 되지 않았고, 동료 의원들조차 동의하기 힘든 내용을 토대로 기자회견을 자청해 일부러 동네 망신이나 시키려는 듯한 일부 군의원들의 모습을 보자니 장탄식만 나온다.
과거 필자가 군의원 신분일 때 필자를 비롯한 동료의원들은 군수나 집행부와 왕왕 부딪히기는 했지만 예산만은 정쟁의 수단으로 삼지 않았다. 예산의 편성이나 집행권한은 군수에게 있지만 집행된 예산의 수혜는 군민의 몫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얼마전 군의회 추경예산 삭감소식이 언론지상에 소개되고 몇몇 지인들을 통해 전해 들은 것만 놓고 보면 과연 군의회가 자신들을 뽑아준 군민들을 위한 예산을 심의한 것인지, 군수에게 “내 말 들으라”라고 으름장을 놓은 것인지 헷갈릴 정도다. 모 군의원은 예산 심의과정에서 아예 대놓고 “군수가 이뻐야 예산을 주지….”라고 대놓고 말했다는 것을 전해 듣고는 헛웃음마저 나왔다.
집행부와 군수를 견제하고 불요불급한 예산 집행이 있을 때 이를 바로잡는 것은 군의회와 의원들에게 주어진 책무이자 군민들이 위임한 권한이다.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이야기해야 하지만 ‘반대를 위한 반대’로 집행부의 발목을 잡는 것은 의회가 해서는 안 될 일이다.
또 의원들이 군민의 혈세로 충당된 업무추진비를 ‘의정협의’라는 이유로 ‘밥값’에만 기천만원의 예산을 썼다는 신문보도를 보고는 한숨도 나오지 않았다. 의장단과 상임위원장에게 주어지는 업무추진비는 말 그대로 의회의 의정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편성된 ‘예산’이다. 의원들의 업무추진비는 들에서 바다에서 피땀 흘려 일해 국가에 낸 세금, ‘혈세’다.
그런 업무추진비를 지역주민들 밥 사주는 일에 쓰고 특히 의원들 중에서도 모범이 돼야 할 의장은 군민들이 낸 혈세를 자신의 가족 챙기는 일에 먼저 사용하고 이를 지적하는 언론에 대고 ‘인지상정’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사회지도층으로서 정상적인 의식을 갖고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그래놓고도 신문과 방송에서 질타가 이어지니 “밥값 말고는 업무추진비 쓸 곳이 마땅치 않다”는 말로 업무추진비 방만 집행에 대한 지적의 본질을 흐리고 있다. ‘밥값’도 얼마든지 의미있는 곳에 쓸 수 있는 ‘밥값’이 있다. 두루뭉술하게 ‘의정협의’라는 이유로 지역 유권자 밥 사는 일 말고도 지역주민은 물론 군민들을 위해 도청으로 중앙부처로 뛰며 예산 확보에 고생하고 있는 집행부 공무원들에게 밥 한번 사는 것이 더 의미 있는 ‘밥값’이다. 몇몇 동네 유지들 서넛이 앉은 자리를 의정협의랍시고 업무추진비로 쓰는게 마치 의원들에게 주어진 특권인양 생각하는 것부터 인식을 바꿔야 한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하나 더 짚어보자. 2년마다 한번씩 가는데도 매번 입질에 오르는 군의원들의 해외연수 이야기다. ‘광복 70주년’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긴 했지만 이번 백두산 관광은 누가 보더라도 ‘연수’보다는 ‘관광’에 가깝다.
필자가 의원으로 있던 시절 두 번의 해외연수 기회가 있었다. 두 번 모두 일본에 다녀왔다. 한번은 쓰레기매립장 문제 등 군내 환경기초시설 운영 문제가 거론될 때여서 이 주제를 놓고 일본을 다녀왔다. 두 번째 연수지를 택할 때 일본이 다시 거론되자 솔직히 동료의원들 사이에 이견이 있었다. 자주 가는 것도 아닌데 갔던 데를 또 가는게 좀 그렇다는 것이다. 이런 저런 의견들이 있었지만 예산을 좀 아끼자는 이유에서 일본이 그나마 가장 저렴하다는 의견이 나왔고 동료의원들의 제각기 속내는 모르지만 다시 일본으로 가게 됐다.
의원들에게 의정연수는 넓은 견문을 쌓는 연수와 교육의 의미도 있지만 회기 중 의정활동에 대한 보상 성격도 있다는 점도 잘 안다. 문제는 명분이고 예산이 쓰이는 일에 대해 의원들이 가지고 있는 진심이다. 그런 진심이 전해진 것인지 필자가 해외연수 갈 당시 기자들이 의회를 좋게 봐 줘서인지는 모르지만 속된 말로 기자들한테 외유성 의정연수라며 ‘까이지는’ 않았다.
업무추진비나 의정연수나 의회 예산삭감이나 요근래 군의회를 보는 군민들의 시선이 곱지는 않다. 문제가 지적된 이후 의회나 논란이 된 의원들의 발언이 오히려 군민들의 마음을 더 상하게 한다. 내용이 어떠하든 지적된 문제에 대해서 군민들에게 사과할 것은 사과하는 것이 우선이다. ‘인지상정’이라는 말 대신 ‘부적절한 행위에 대해 사과하고 조심하겠다’는 말이 먼저 나와야 한다.
그것이 인근 하동이나 순천, 여수 등 이웃동네를 뛰어넘는 우리 동네의 발전을 기대하며 오늘도 들로 산으로 바다로 나가 생업을 이어가며 의원들에게 마음을 실어보내 주는 군민들에 대한 예의다.
불과 몇 천원짜리 점심 한 끼도, 보일러 기름도 아까워 전기장판 한 장으로 겨울을 나는 군민들이 부지기수다. 그 어려운 속에서도 그들은 납세라는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한다. 그런 군민들에게 밥값으로 1년 남짓 수천만원이 넘는 예산을 썼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규정을 위반한 것은 아니라는 말 대신 진솔한 사과와 이해를 구하는 것이 먼저다.
군민들에게 위임된 권리를 마치 의원 자신의 것인양 생각해서는 안 된다.
군민들이 왜 실망하고, 왜 화를 내는지에 대한 자성을 토대로 다친 군민들의 마음을 다독이는 사회지도층으로서의 군의원, 군의회의 모습을 보게 되기를 기대한다.
군의원에게 군민은 가장 친근한 존재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가장 무서운 존재다. 필자 역시 지난 시간을 되짚어봐도 이 말에는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답답한 마음에 글이 너무 길어졌다. 필자의 경험을 토대로 하기는 했으나 필자의 경험이 꼭 사리에 맞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의원들이 곧잘 하는 말대로 정말 ‘군민의 뜻’을 받들어 의정활동을 펼치고 있는지 ‘군민의 뜻’을 빌어 개인의 사견이 의정활동의 주가 되고 있지는 않은지 냉철히 따져 봐 주기를 바란다.

/윤백선 전 남해군의회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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