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에 입각하여 진리를 탐구하는 것을 말하며,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 보는 것과 같은 실험과 연구를 거쳐,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을 통하여 정확한 판단과 해답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중국 후한서(後漢書)에 나오는 ‘수학호고 실사구시’에서 유래된 것으로, 청나라 초기에 고증학(考證學)을 표방하는 학자들이 공리공론만을 일삼는 표어이다. 이와 같은 과학적 학문태도는 우리의 생활과 거리가 먼 공리공론을 떠나 마침내 실학(實學)이라는 학파를 낳게 하였다. 이 실학사상은 우리나라에도 조선중기에 들어와 많은 실학자를 배출시켰으며 이들은 당시 지배계급의 공론을 배격하고 이 땅에 실학문화를 꽃 피우게 하였다.
중국 마오쩌둥(毛澤東)의 실사구시를 음미해 보면, 마오쩌둥은 1941년 6월 19일 연안(延安)에서 발표한 ‘우리의 공부를 바꾸자(改造我們的學習)’라는 글에서 ‘실사구시’란 단어를 해석했는데 ‘실사(實事)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사실적인 사물이고, 시(是)는 객관적인 사물의 내부적 연관 즉 규칙성이고, 구(求)는 바로 우리가 연구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국내외(國內外) 성내외(省內外) 구내외(區內外)등의 실제 상황으로부터 출발하여,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일에서 올바름을 찾아가는 것이 바로 실사구시적 방법이다. 만약 우리가 어떤 국내외 크고 작은 사건과 특정 사안에 대해,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간에 그 사실을 고의적으로 은폐·왜곡하거나 혹은 부정확하게 파악하여 접근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 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회의 혼란과 분쟁이 지속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가슴에 와 닿는 말이다. 실사구시와 거리가 먼 예를 보면 사람의 심리 ‘4’ 자를 의도적으로 피하는 내면에는 한자의 ‘죽을 사(死)’와 발음이 같다는 인식이다. 한자의 ‘사(死)’ 자(字)를 인명(人名) 상호 등에 써서는 안 되겠지만 엄연히 아라비아 숫자인 ‘4’ 자를 과도하게 혐오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고 본다. 프로야구에서 보듯, 4번 타자가 누가 뭐래도 가장 스타플레이어고 팀에서 가장 우수한 선수다. 1, 2, 3번 타자가 나가있는 만루상황에서 4번의 만루 홈런은 정말 환상적이지 않은가. 그래도 ‘4’ 자를 기피할 것인가? 400만원, 4000만원, 4억원으로 돈을 지불받는 경우에도 ‘4’가 싫어 “덜 지불해 주시오”라고 말할 수 있을지 사뭇 궁금하다. 세상이 분초를 다투며 격변하고 있다. 지구촌 소식이 삽시간에 실시간으로 알려지는 글로벌시대, 실사구시로 모든 문제를 풀어 나가야 할 이때, 미신 따위를 쫒는 불합리에 매몰돼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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