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려 처 정씨는 진양 정씨로 이름은 소사이다. 설천에서 이동면 영지로 시집 온 지 채 2년도 못돼 남편이 갑자기 이름 모를 병이 들었다. 정씨는 여러 곳을 찾아다니며 갖가지 약을 구해 정성을 들여 달여 드렸으나 아무런 효험이 없었다.
결국 생명이 위험한 지경에 이르자 자기 손가락을 깨물어 그 피를 남편의 입에 흘려 넣는 단지주혈까지 하면서 생명을 연장시켰다. 그러한 그의 정성이 하늘에 통했는지 남편의 생명이 3일간 연장됐다. 그러나 워낙 중병이라 지극한 정성에도 불구하고 결국 3일후 죽고 말았다.
남편과 사별한 정씨는 너무나 애통해 하며 남편의 넋을 조금이라도 위로하고자 시묘살이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정씨는 남편의 묘 옆에 움막을 짓고 밤낮으로 떠나지 않고 지키고 보살피며 3년간의 시묘살이를 했다. 시묘살이 하는 동안에는 여인의 몸인지라 항상 몸에 은장도를 지니고 있으면서 몸을 지켰다.
남장을 하고 묘를 지키는 정씨의 모습은 죽은 사람보다 더한 몰골이었다. 정씨를 본 사람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한 추상같은 절개는 변함이 없었고 뼈와 살을 깎는 3년간의 시묘살이를 마쳤다.
친정 집안사람들은 정씨가 아직 젊고 남편을 위해 최선을 다해 병수발을 했으며 사후에 시묘살이 3년을 마쳤으니 개가해서 남은 인생을 보내라는 권유를 했다. 그러나 정씨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시묘살이 후 그의 절개가 널리 알려지고 더욱 굳어져 동리 사람들의 칭찬과 칭송의 소리가 높아갔다.
숙종 7년(1681년) 신유년에 어사 이사영이 지방 순찰시 마침 영지를 지나다 들렀다. 어사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이 사실을 듣고 조정에 상신하니 정시는 열녀 칭호를 받게 됐다. 열녀 칭호를 받은 정씨는 더욱 더 몸가짐을 삼가고 집안을 욕되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열녀 정씨는 시묘살이 후 설천 친정 부모님께 인사차 다니러 갔을 때이다.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정씨는 시가집으로 가야 한다고 장대비가 퍼붓는데도 친정집 대문을 나섰다. 친정부모는 걱정이 되어 뒷날 가라고 만류했지만 집과 남편의 묘가 걱정돼 뿌리치고 억센 폭우를 맞으면서 영지로 오던 중 이동 개천 물방다리에 이르렀다.
개천을 폭우로 물이 불어 도저히 건널 수가 없었다. 서성거리며 애태우고 있을 대 난데없이 큰 짐승이 나타나 꼬리를 치며 안내하기에 그 짐승의 등을 타고 개울을 건너 집으로 돌아와 남편의 묘와 집을 지킬 수 있었다고 한다. 그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은 산신령이 부인의 정절에 감동해 호랑이를 보내 도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숙종 9년(1683) 남해현령 이민이 그 열녀의 공적을 기록 유지했고 최흥국이 뒤를 이어 계속 유지해 오다가, 최신오에 이르러 열녀비를 세우고 비각을 지어 자손대대로 관리케 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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