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읍성 동문 안에 ‘칠선당골목’이라 불리는 곳이 있었다. 일곱 명의 시녀 또는 미녀를 모신 사당인 칠선당에서 넋을 기리는 제향을 모셨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하지만 지금의 남변리 회화나무 주변에 있었던 사당이 없어져 정확한 위치는 알 수가 없다. 일곱 시녀의 혼령이 회화나무로 옮겨갔다고 생각한 마을 사람들은 일곱 그릇의 메를 지어 제사를 지냈다. 이 의식이 동제로 변해 매년 음력 10월 10일 일곱 시녀의 넋을 기리는 당산제를 모시고 있다. 일곱 시녀에 대한 구전설화는 세 가지가 전해지고 있다.
첫 번째는 천장군과 일곱 시녀의 이야기이다. 숙종과 장희빈 사이에 태어난 조선 제20대 경종의 왕비와 궁녀가 같은 시기에 아이를 가졌다. 경종은 딸을 낳는 사람은 귀양을 보내겠다고 미리 공포했다. 그런데 경종의 기대와는 달리 왕비가 딸을 낳고 궁녀는 아들을 낳고 말았다. 경종은 어쩔 수 없이 왕비를 전라도 여수 대경도로 귀양을 보냈다.
훗날 경종은 암행어사 박문수에게 사실여부를 다시 확인하게 하였다. 어사 박문수는 궁녀가 교묘한 방법으로 아기를 바꿔치기 했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딸을 낳은 사람은 왕비가 아닌 궁녀였다. 왕비는 유배에서 풀려나고 궁녀가 전라도 여수 대경도 아래 소경도로 귀양을 떠났다. 왕은 궁녀를 감시하기 위해 천장군과 일곱 명의 시녀를 딸려 보냈다.
왕의 성은을 입지 못하고 대궐에서 쫓겨난 궁녀는 유배지에서 밤마다 처소를 나와 남자와 교유하면서 부정한 행동을 했다. 이 사실을 안 천장군은 분노하여 경종에게 보고하지도 않고 궁녀의 목을 베어 버렸다. 아무리 궁녀가 부정한 짓을 저질렀다고 해도 왕의 성은을 받고 옹주를 생산했기 때문에 죽일 수는 없는 것이었다. 천장군은 어쩔 수 없이 남해군 고현면 관당마을에 숨어살았다.
그런데 같이 귀양지로 내려와 궁녀와 천장군을 보필하던 일곱 시녀가 남해 관당마을까지 따라와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그녀들의 집요한 애정 때문에 곤란한 지경에 처한 천장군은 관당마을 뒷산인 대국산 속으로 피해 들어가 성을 쌓고 은거하였다.
천장군을 따라가지 못한 일곱 시녀는 결국 시름시름 않다가 죽고 말았다. 그 후부터 관당들에는 수해와 한해가 계속되었다. 관당마을 주민들은 일곱 시녀의 혼령 탓이라고 생각하고 칠신당을 짓고 제사를 모셨다. 그 이후로는 자연재해가 없어졌다고 한다.
그 후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남해현의 소재지인 남해읍성 안 남변리 회화나무 주변으로 칠신당을 옮겨 해마다 동제 때에는 제사를 모시면서 일곱신을 모시는 뜻으로 일곱 그릇의 메를 담는다고 전한다.
두 번째는 고려 말 나라에 큰 공을 세운 대감이 대원군이라는 작호와 미녀 일곱 명을 하사받아 남해현으로 내려와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왜구가 한밤중에 대감집을 급습하여 대감을 죽였다. 대감의 죽음을 비통해 하던 일곱 미녀는 슬픔에 결국 자결하고 말았다. 그 후 현령이 대원군 대감을 기리는 제는 올리면서 일곱 미녀의 제는 올리지 않았다. 이를 섭섭하게 여긴 일곱 미녀가 현령의 꿈에 나타나 항의했다. 현령은 남해읍성 동문 안에 있는 회화나무 옆에 칠선당을 짓고 제향하며 일곱 미녀가 자신들이 모시던 천장군을  따라 목숨을 버린 열행(烈行)을 기렸다고 한다.
세 번째는 관음포에서 왜구를 섬멸한 정지 장군을 모시던 일곱 시녀가 관음포대첩이 끝난 후 고현면 관당에서 죽어 대국산성에 묻었다. 그런데 이 시녀들의 원한으로 관당들에는 해마다 재해가 생겨 흉년이 들었다. 원님이 이 소식을 듣고 시녀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남해읍 남변동 회화나무 자리에 사당을 지어 제사를 모시게 했다. 일곱 시녀를 모신 곳이라 하여 ‘칠선당’이라 하고 이 주변을 칠선당 골목이라 불렀다고 한다.

저작권자 © 남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