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떠난 사람이 돌아오지 않거나 소식이 없다’는 뜻으로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당시 다섯째 아들 방원(태종)은 적지 않은 공을 세웠다. 하지만 태조는 여덟째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고 이에 격분한 방원은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방석을 폐묵(廢默)시켰다. 이에 태조는 크게 분노하여 둘째 방과(정종)를 왕에 앉히고 함경도 함흥으로 떠났다.
하지만 방과는 무력해 동생 방원의 세력에 왕위를 물러주고 방원이 즉위하는데 옥새(玉璽)가 없으니 왕이 됐다 한들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러므로 옥새를 가진 태조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신하를 함흥으로 보내려고 하지만 아무도 가려하지 않자, 박순(朴淳)이 자청하여 떠났다. 결국 태조의 마음을 움직여 환궁(還宮)의 뜻을 얻어 냈지만 신하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태조는 이미 떠난 박순이 강을 건넜다면 그냥 보내되 못 건넜으면 죽이라 명하였다.
그러나 당시 박순은 이미 병환으로 강을 건너지 못하고 죽었다. 이에 태조는 애석하여 태종에게 옥새를 넘겼다고 한다. 그동안 태조와 화해(和解)하기 위해 많은 문안사(問安使)와 신하들이 함흥으로 여러 번 갔지만 모두 죽어 소식을 들을 수 없을 때 함흥차사라고 불리어 졌다. 설화는 태조가 태종이 보낸 차사(파견관원)를 오는 대로 족족 죽였다는 데에서 오랫동안 소식이 없는 사람을 일컬을 때 쓰는 표현으로 생각하면 된다. 실제 역사에서는 태조가 함흥차사들을 그렇게 죽이지 않았다고 하는데 함흥차사 이야기는 역사와 다른 ‘가상의 전설’로 보면 좋을 것 같다. 예컨대 함흥차사에 나오는 차사 중 마지막 차사인 박순의 경우 태조의 마음을 돌렸으나 이 후 태조의 주변 신하들의 요청으로 박순의 뒤를 쫓되 이미 강을 건넜으면 놓아두고 건너지 않았으면 죽이라고 하는데 시간의 흐름으로 봐서 강을 건넜겠지 하는 심정으로 죽이라고 했지만 박순이 마침 중환으로 강을 건너지 못한 관계로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는 박순의 죽음은 태조와도 관련이 없고 강물을 건너는 여부(與否)와도 관련이 없다고 한다. 태조가 함흥에 있을 때 추종하는 세력들이 태종을 상대로 반란(조사의의 난)을 일으켰다. 이때 박순은 태조를 설득하러 간 것이 아니라, 함흥 인근지역의 수령들을 상대로 반란에 가담하지 말라고 설득하려다 오히려 반란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태종이 아버지태조와의 화해와 환궁을 위해 함흥으로 보낸 차사를 일컫는 말로, 심부름을 보냈는데 떠난 사람이 영영 돌아오지 않거나 오랫동안 아무런 소식이 없을 때 함흥차사라 한다. 비슷한 말로 함안차사(咸安差使), 강원도포수, 지리산포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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