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를 얻기 위해서는 자신을 굽히고 상대방에게 예(禮)를 다해야 한다는 뜻으로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유비(劉備)가 제갈량(諸葛亮)의 오두막집을 세 번이나 찾아가 간청했다는데서 유래한다. 유비는 관우(關羽), 장비(張飛)와 의형제를 맺고 군사를 일으켰으나 군기(軍紀)를 잡고 계책을 세워 전군을 통솔할 장수가 없어 늘 조조(曺操)군사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다.
유비는 조조에게 쫒겨 향주의 유포(遊褒)에게 몸을 위탁하고 널리 인재를 구하고자 은사인 사마휘(司馬徽)에게 훌륭한 장수를 천거해 달라고 청하자 “복룡(제갈량의 별명)이란 사람을 얻어 시오” 라는 답변을 얻는 중, 어느 날 서서(徐庶)가 찾아와 제갈공명에 대한 자세한 예기를 들러주었다.
서서는 제갈량에 대해 “지금은 초막에 묻혀서 한가에게 밭이나 갈고 농사를 짓고 있는 신세지만 가만히 누워있는 용(龍)”이라고 말을 했는데 그러자 유비는 “그를 한번 데리고 와 달라”고 부탁했으나 서서의 대답은 “장군께서 제갈량의 집을 방문 하신다면 그를 만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불러들인다면 그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유비는 즉시 수레에 예물을 가득 싣고 양양(襄陽)땅으로 눈보라를 헤치며 고생 끝에 제갈량의 초가집을 찾아갔으나 어디론가 출타하고 집에 없었다. 며칠 후 다시 찾아갔으나 역시 없었다. 유비는 “지난번에 다시 오겠다고 했는데 이거, 너무 무례하지 않습니까? 듣자니 그 자는 아직 나이도 젊다는데”라며 “그까짓 제갈공명이 뭔데, 형님 이젠 다시 찾아오지 마십시오”라고 말하는 관우와 장비가 불평을 쏟아내자 “다음엔 너희들은 따라오지 말아라”라며 이듬해 봄 관우와 장비의 만류에도  유비는 단념하지 않고 세 번째 방문길에 나섰다.
유비가 다시 찾았을 때 다행히 제갈량은 집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고 유비는 그를 깨우지 않고 일어날 때까지 초조하게 기다리며 생각에 잠겼다. 초라한 자신의 집을 세 번이나 찾아온 유비의 끈질긴 인내심과 정성에 감복한 제갈량은 유비를 따라 나섰고 마침내 유비의 군사가 되어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100만 대군을 격파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다.
천하의 제갈량을 얻은 유비는 승승장구 마침내 촉한을 세워 황제가 되었으며 지략과 식견이 뛰어나고 충성심이 강한 제갈량은 재상(宰相)이 되었다.
좋은 인재를 얻기 위해서는 사심을 버리고 각별한 정성과 노력이 요구되며 우수한 인재등용은 객관적이고 공평한 인사제도가 선행돼야 한다. 바람 잘 날 없는 인사잡음, 인사시스템 붕괴로 정부나 많은 지자체가 몸살을 앓고 있는 상황에서 삼고초려의 의미를 다시 되새겨 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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