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2004년 10월 16일 44년 4개월만에 고향을 찾아온 곽동의씨가 사천공항에 발을 디뎠습니다. 조국의 민주인사들이 ꡐ한민통 명예회복 및 고국자유왕래를 위한 대책위원회ꡑ를 꾸려 한민통 회원들을 고국으로 초대하는 행사를 마련해 그는 한통련 회원 144명과 함께 지난 10일 입국했습니다.

 

그를 위해 사천공항에 마중나온 혈육 동갑내기 사촌 곽영규씨를 본 곽동의씨는 ꡐ살아서는 만날 수 없으리라 여겼는데 이렇게 만나다니 꿈만 같구나, 너도 백발이 다되고 나도 백발이 다 되었다. 살아서는 만날 수 있을까 애태운 지 얼마냐ꡑ며 얼싸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 상임고문인 곽동의씨는 일제시대였던 1930년 남해읍 북변리(현 청수탕 뒤쪽)에서 태어났고, 어린시절 부모가 돌아가셔 할머니 품에서 누나와 사촌형제들과 함께 자랐습니다.


그는 남해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사범학교와 진주농림학교(진주산업대의 전신)를 나와 20세에 일본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그가 32살이었던 1961년 5월 16일 조국에서는 군사쿠데타가 일어났고 그는 조국의 군사정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선언을 했습니다. 그길로 그는 입국금지대상이 됐고, 44년간 고향을 그리며 일본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곽동의씨는 남해에 막 들어서는 삼천포대교에 차를 세우고 44년동안 마음속에 담아둔 고향 남해의 바다를 한참 동안 응시했습니다. 


또한 그는 고향의 산천을 바라보며ꡐ나의 고향이 이렇게 아름다웠던가! 우리 형제의 가슴에 맺힌 한이 깊지만 고향 땅을 밟으니 그 한조차 눈 녹듯 하는구나ꡑ라며 고향에 대한 반가움을 표현했습니다.


스포츠파크호텔에 여장을 푼 그는 남해지역운동연대회의 등 남해 사회단체들이 준비한 조촐한 환영행사를 맞았습니다.

그는 행사에서 조국이 해방된 지 60년이 되는 내년을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여는 원년으로 삼자! 나는 여생을 조국의 자주와 평화적 통일을 위해 바치겠다고 후배들에게 전하기도 했습니다.


다음날 그는 형제들과 함께 고향집 안방에서 아침을 먹었습니다. 할머니가 앉았던 그곳에서 그는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을 회상하며 눈시울을 적시고 가족들과 그동안의 못다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는 누나가 별세했을 때 입국신청서를 냈으나 정부가 그에게 앞으로 절대로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내밀며 손도장을 찍으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그는 신념을 꺾으면서 누나에게 간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누나는 내가 그런 모습으로 자기 옆에 오면 야단을 칠 사람이라며 그 자리에서 여권을 찢어버렸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자신 때문에 고향에 있는 형제들이 하루아침에 공직에서 쫓겨나고, 아무런 이유없이 옥살이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생살을 찢는 것과 같은 고통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며 지난 이야기를 회상했습니다.


아침식사를 끝내고 할머니와 부모님의 묘소를 찾은 그는 봉분을 온몸으로 얼싸안고서 오랫동안 통곡을 해 주위사람들의 눈시울까지 적셨습니다.


이틀간의 짧은 고향방문을 마친 그는 내년 5월 다시 고향을 찾고 싶다고 했습니다.

생애 마지막 5년을 내 고향 남해에서 살고 싶다는 말에 우리는 그동안 그가 고향의 그리움이 얼마만큼 간절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 곽동의!

그를 우리 남해가 배출 할 수 있었던 것이 우리는 자랑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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