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관계가 주춤거리는 지금, 남북한 실향민과 해외동포들은 남북관계 진전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의 통일에 대한 염원이 하루 빨리 당겨지길 바라면서 지난 10월 8일부터 10일까지 남북한 대표적 합작사업인 금강산관광특구를 현장방문한 정현태 향우의 글을 2회에 걸쳐 싣는다.


8일 오후 7시, 어둠이 깔린 광화문에서 버스에 동승한 우리 일행은 양평과 홍천을 거쳐 밤 11시 쯤 고성에 있는 금강산 콘도에 도착했다. 짐을 옮긴 뒤 속초 횟집에서 저녁식사 겸 소주를 한 잔 하면서 금강산 방문에 대한 흥분을 가라앉히고 새벽 2시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9일 새벽 6시에 일어나 짐을 챙긴 뒤 현대아산 금강산사업소에서 나눠주는 '금강산통행증'(일명 방북증)을 받고 휴대폰은 모두 맡긴 채 각자의 차에 올랐다. 어둠을 가르면서 차는 북으로 달려 우리측 CIQ(관세통관 및 검역소)에서 심사를 받은 뒤 다시 북으로 달렸다. 남측 민통선을 넘어서자 안내하는 젊은 여성 조장(현대 아산에서 나온 인솔책임자)은 “자, 여러분 군사분계선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조금 있으면 남측과 북측을 가르는 군사분계선이 나올 것입니다.” 그 말에 나는 조금 긴장되면서도 궁금한 마음으로 창밖을 응시했다. 그런데 50년 넘게 한반도를 갈라온 군사분계선은 낡은 팻말 하나가 전부였다. 순간 허탈한 마음에 한숨소리가 절로 나왔다. "아니, 저 팻말 하나 때문에 우리가 50년을 넘게 갈라져 살아왔단 말인가? 1000만 이산가족들이 저 팻말 하나 때문에 피맺힌 한을 품고 살아왔단 말인가?" 한숨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지금 남측도 북측도 동해 북부선을 연결하기 위해 공사가 한창이었고, 군사분계선을 넘자 200m 간격으로 북측 군인들이 서서 근무를 서고 있었다. 조장은 "사진 촬영은 금강산 이외의 곳에서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면서 신신당부를 했다. 나는 북측을 지키는 군인들조차 키가 너무도 작은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금강산으로 가는 차 창밖으로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북측 첫마을 봉화리, 그리고 소학교가 있는 금천리를 지나 마침내 금강산 호텔이 있는 금강산 관광의 출발지, 온정리에 도착했다.

온정리는 ‘따뜻한 온천수가 나오는 우물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현대아산에서 이곳에 온정각휴게소를 지었고, 하루 두 차례 평양 모란봉 기예단 공연을 위한 금강산 공연장도 지었다.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북측 CIQ에서 통관절차를 밟은 뒤 8시 반쯤부터 금강산 첫날 구룡연 산행을 시작했다. 금강산은 입구부터 미인송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는데 가지는 적고 푸른 하늘을 향해 늘씬하고 쭉쭉 뻗은 적송은 황제의 관을 짠다고 하여 황장목으로도 유명하다고 했다. 구룡계곡의 물은 비취빛으로 연푸른 색깔을 띠고 있었는데 바위와 부딪치면서 게르마늄 성분을 머금고 있어서 그렇다고 했다. 현대 관계자는 "금강산은 민족의 자산이라 나무 한 그루 돌멩이 하나도 조심스럽게 개발을 하고 있다"고 말해 금강산 개발에 임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앙천대, 옥류담 등 구룡연의 절경 곳곳에는 북측 안내원이 나와 정겨운 북녘 사투리에 맛깔스런 말솜씨로 금강산의 전설을 들려주었다. 즉석에서 최치원의 고시를 줄줄 외우면서 남측 관광객들을 반기는 그들의 모습에서 금강산은 이미 우리 민족 모두의 자랑이요, 온 겨레의 통일산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구룡연은 단풍이 들기 시작해서 올라 갈수록 만산홍엽이었고, 아홉 마리의 용이 날아갈 듯한 형상을 한 구룡폭포의 장쾌함은 그야말로 비류직하 삼천척(飛流直下 三千尺) 그대로였다.


산행을 마친 뒤에는 금강산 온천에 가서 피로를 푼 뒤 비빔밥으로 점심을 급하게 먹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이렇게 실감나게 다가온 적은 일찍이 없었다. 식사 뒤에는 현대 아산이 북측과 공동으로 운영하는 <농장>을 견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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