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7월 23일의 휴전은 만 3년간, 한반도에서 치열한 살상과 파괴의 전쟁이 멈추었던 날이다. 즉 1950년 6월 25일, 김일성 정권이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38선을 넘어 남한을 침입, 동족을 살상과 파괴의 전쟁을 감행하자, UN 측은 만 3년 만에 더 이상 사람을 죽이는 전쟁을 중단하자고 하여 양측이 합의한 날이다. 왜 그런 비극의 전쟁이 한반도에서 발생했고, 그 원인은 무엇이었던가? 그 전쟁에서 희생한 생명과 휴전이 남긴 교훈은 무엇이었던가를 남북동족은 기억해야 한다.
 패전한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기 위해서 북위 38도 선 이북은 소련군이, 이남은 미군이 각각 분담하기로 합의했다. 일본군의 무장해제라는 잠정 합의가 양국 군대의 장기 주둔과 함께 공산 사상과 자유민주 사상의 대립 정권이 남과 북에서 탄생하게 되었다. UN에서 파송한 선거위원들의 감시하에 남북동시 총선거를 북측이 거부함으로써 남한 단독으로 선거하여 대한민국을 탄생시켰고(1948년 5월 10일), 북한은 동년 8월 25일에 소련 주둔군 지도 아래 김일성 정권이 세워졌다. 소련 수상 스탈린의 국제공산주의화 정책에 김일성 정권은 소련제 탱크와 야포 등의 무기로 2년간 남침 준비를 하고, 대한민국에서는 공산주의의 남로당 세력들이 국회와 군대에까지 잠입하여 여러 지역에 반란 사건을 일으켰던 차에, 대한민국 정부가 점차 남로당 세력을 제압하자, 김일성 정권은 적화통일의 기회를 앞당겨 1950년 6월 25일에 남침을 감행했던 것이다. 소총만으로 무장한 남한 경비대군은 소련제 탱크 공격에 후퇴를 하여 3개월 후, 낙동강 하류선을 최후 방위선으로 구축하고, 대구시와 부산시를 방위하고 있었다. 이 시점에 맥카터 사령관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여, 그 후 3개월 만에 압록강과 두만강 부근까지 UN군과 국군은 진격하였고, 북한군은 며칠 내면 한반도에서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긴박한 시점에 대한민국은 통일의 기회가 눈앞에 보였다. 그때에 중공군 수십만 병력이 인해전술 공격으로 압록강 얼음판을 건너와 전쟁판은 확대되었다. 1951년 1월까지 중공군 약 27만명, 북한군 6만명이 UN군과 국군을 포위하면서 공격했다. 미군은 이때부터 휴전을 모색하면서 반격에 소극적이었다. 이승만 정부와 국군은 수일 안에 통일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전선을 38선 후방으로 후퇴하는 UN군 작전에 매우 불만했다. 그러나 한치 땅이라도 더 점유하기 위해서 국군은 치열하게 싸웠다. 예로서 강원도 철원의 395고지 쟁탈전은 중공군과 국군 9사단이 11차례까지 치렀다. 필자도 그 전선에서 UN군의 병사로 근무하면서 국군 전사자와 중공군 전사자를 눈뜨고 볼 수 없었던 장면을 경험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군 사령부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버티다가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단판 하여, 휴전 조건을, 한미 군사 방위조약 확약, 경제원조 2억 불, UN 측이 휴전 성과를 얻지 못할 때 휴전회담 파기하고 통일 행동에 들어갈 것, 국군 20개 사단 증강과 해군과 공군력 강화할 것, 한미 고위회담 개최 등의 조건을 제시하여 미국정부가 동의함으로써 이 대통령도 휴전에 동의해주었다. 문제는 포로 교환이었다. UN군이 제시한 적군 포로는 북한군 111,754명, 중공군 20,720명, 미군 3,198명, 기타 UN군 1,216명이었다. 북으로 가겠다는 북한군포로는 약 65,000명으로서 전체 포로의 58.2%였고, 중공군은 5,000명으로서 전체 포로의 24%였다. 그 외 포로들은 자유 대한 과 대만으로, 중립국으로 가겠다는 희망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포로수용소 국군 경비대와 경찰관에게 지시, 6월 18일 밤에 반공포로 석방을 명령했다. 각 수용소에서 약 27,000명이 탈출에 성공하여 이들은 자유대한에서 가정을 이루고 살게 했다.
 이런 민족의 비참한 전쟁이 잘못된 공산주의 사상과 독재자들의 허상(虛像)에서 일어난 것이다. 독일 히틀러 독재자와 일본제국 주의자들의 독재 사상 가운데 허상이 2차 대전에서 수백만명의 인명 살상과 재산 파괴를 초래했듯이, 스타린과 모택동, 김일성의 공상 주의 독재 사상은 허상을 맹신하고, 우리 민족에게 전쟁을 발생시켜 비극을 안겨주었다.공산주의 사상은 인간 존엄을 무시한 허상이 있어서 전쟁 도발의 원소(元素)를 함유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해 주었고, 공산주의 사상 속에는 허상이 잠재하고 있어서 실천 불가능한 사고로 자신과 서민들을 불행한 함정 속으로 이끌어가고 있다는 것도 보여주었다. 그것이 냉전 후 소련과 중공이 공산체제를 수정하고, 자본부의 체제를 부분적으로 도입하게 된 것이 입증하고 있다. 북한은 공산주의 사상의 가면을 쓰고 세습독재체제로 전환하고, 공산주의 사상의 허상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6.25전쟁과 7.23휴전은 어느 한쪽의 승리나 성공도 아닌 민족 살상과 재산 파괴만 남겨주었다는 교훈이었고, 외국에 의지한 안보도 신뢰할 수 없다는 교훈도 남겨준 것을 명심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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