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이는 알아도 전쟁은 모르는 이 나라의 무관심이 더 아프다”

그 어느 4월보다 ‘잔인했던 4월’이었다. 피어보지도 못하고 져버린 그들이었기에 올해 4월은 누구에게나 가슴아린 4월이었다. 그리고 다시 또 6월이다.
이미 반 세기를 훌쩍 넘어버린 그 ‘6월’이 또 돌아왔고 이마와 얼굴에 잡힌 주름의 골만큼 가슴 한 켠이 아린 ‘6월의 그들’이 다시 한 자리에 앉았다.
지난해 기자에게 그들의 ‘6월 이야기’를 들려줬던 6·25 참전유공자회 정한규 부회장과 무공수훈자회 김달기 회장, 대한민국상이군경회 남해군지회 정재득 회장의 반가운 얼굴을 다시 마주했다. 올해는 이 자리에 처음으로 이들 전우들의 유족이 함께 자리에 앉았다. 대한민국전몰군경유족회 박진국 회장도 ‘6월 이야기’에 함께 했다.
지난해 지병으로 이 자리에 함께 하지 못했던 6·25 참전유공자회 여주대 회장이 올해는 이 자리에 함께 했다. 반가웠다. 그리고 다행이었다.
제작년 6월 어느날 여 회장을 만났을 때 그는 나지막히 들릴 듯 말 듯 “내년에도 기자양반 또 볼 수 있을까 싶소”라고 했다. 그랬던 여 회장은 2년이 지난 지금, 이 자리에서 정정한 모습으로 또다시 막내 손자뻘 될 성 싶은 기자에게 60여년 전 당신의 ‘6월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고 있었다. 다만 이야기의 시작은 여전히 가슴 아픈 이야기로 시작했다. 이들의 ‘6월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됐다.
“서면 살던 그 분이 ‘가셨다’고 했지요?”. 여주대 회장이 옆에 앉은 무공수훈자회 김달기 회장에게 물었다. 여 회장의 말에 김 회장이 답하기도 전에 6·25 참전유공자회 정한규 부회장이 나서 질문을 받았다. “2~3년 뒤에는 다들 ‘갈’ 판인데…”라며 ‘허허’라며 웃는 정한규 부회장의 웃음에 마음이 ‘헛헛’해 졌다.
이들의 6월 이야기는 또다시 먼저 가버린 전우(戰友)들의 이야기로 시작했다.
64년전 정든 고향, 슬퍼하는 가족을 뒤로 하고 어느 전장, 어느 고지인지도 모를 곳에서 꿈을 채 펼쳐 보지도,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마지막 인사조차 못하고 숨을 거둔 당시의 전우들에 대한 이야기와 지난 60여년의 시간동안 같은 아픔을 함께 가슴 속으로 품어오다 이제 전장의 전우들의 뒤를 따라간 또다른 전우들의 이야기가 그렇게 한동안 담담하게 이어졌다. 6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 해 6월’의 기억은 왜 나이가 들수록 더욱 또렷해는지 모르겠다던 노병(老兵)들의 이야기는 그들의 기억이 또렷해지는 만큼 그보다 더 빠르게 ‘6월’을 잊어버리는 사회의 무관심, 그 ‘무관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이들의 목소리 톤은 한층 격앙됐다.
나라에서는 ‘당신들이 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습니다’라며 이들을 영웅처럼 이야기 하지만 정작 이들이 받는 예우라고는 나라에서 매월 주는 17만원의 참전명예수당, 그리고 남해군 참전유공자 지원조례에 따라 매월 나오는 5만원이 고작이다.
그리고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나, 고궁, 국가나 지자체가 운영하는 공공시설 등등에서 국가유공자증을 보여주면 입장료 면제나 이용료 할인 등의 혜택이 있지만 살아있는 이들 중 절반이 넘는 전우들이 ‘살팎(사립 밖)’ 출입도 힘든데 그게 무슨 소용이냐 있겠냐며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이다.
특히 시간이 흐르며 한정된 국가유공자 예우와 관련된 예산 한계에 반해 점차 늘어나는 유공자 또는 의사자 등에 대한 예우의 폭이 함께 넓어지다 보니 이들에게 쏠렸던 관심도 점차 줄어드는 현실에 거듭 안타까움을 표하는 이들이다.
그러던 중 여주대 회장이 한참을 숨을 가다듬고 난 뒤 툭 던진 한 마디에 모두가 잠시 숙연해진다.
“내는 10년전에 울 안사람 먼저 보냈네…. 그런데 우리 안사람 참 고생 많이 했네.”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는 건가 했다. 이어지는 말에 잠시 펜을 굴리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지금은 조금 수그러들긴 했지만 60여년 전 전장에서의 기억은 젊었을 시절 여 회장의 꿈자리를 늘 차지했다.
“밤이 돼 눈을 붙이면 오래 전 일인데도 포탄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고 옆에서 피 흘리던 전우들, 또 죽어갔던 전우들이 한 번씩 꿈에 나와…. 그러면 소스라치게 놀라서 잠꼬대를 꼭 생시같이 하게 된단 말이지. 옆에 같이 살던 안사람이 얼마나 놀라고 또 안타까웠겠어. ‘과부 안 된게 어디냐’며 스스로를 위로했겠지만 참전유공자들 가족들 대다수가 이런 경험이 있을건데…. 이들에 대한 배려는 단 한 번도 높은 사람들 입에서 나오지가 않더라고. 나 죽으면 지금 그나마 나라에서 주는 돈도 끊기고 죽은 뒤라고 우리 남은 식구들에게 돌아가는 것도 없겠지만…. 적어도 지금 살아있는 참전용사들, 상이군경들 그 가족에 대한 관심과 배려도 나라에서 좀 신경써 줬으면 좋겠어….”
한 마디 한 마디, 어절마다 꾹꾹 힘을 줘 가며 감정을 다독거리던 여 회장의 눈에 약간의 물기가 배어나는 것이 눈에 들었다. 여 회장의 이 말이 있은 뒤 함께 한 이들의 고개가 잠시 숙여지며 잠시지만 깊은 침묵이 이들을 둘러쌌다.
“가수 싸이는 온 국민이 다 알지만 정작 6·25는 모르는 젊은이들, 모든 국민들이 가슴아파했던 세월호 만큼이나 6·25는 잊어서는 안 될 우리의 역사다. 그리고 ‘만약 이들 참전용사들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됐을지를 생각하는 것은 꼭 ‘6월’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 남해군재향군인회 구재모 회장의 말이다.
이틀 뒤, 6월 25일 남해문화체육센터에서 제64주년 기념 군민대회가 열린다. 6·25전쟁의 아픈 기억을 되새기고 젊음과 목숨을 바쳐 산화한 호국영령과 참전용사들의 위국헌신의 정신을 기린다는 이 행사는 여느 해처럼 체육관 하나를 통째 빌려 ‘산 자들의 편리함’을 위한 행사로 열린다. 저기 저 조금 멀리 이동면 앵강고개 군민동산에 그들의 이름이 새겨진 기념탑이 서 있는 곳이 아닌 ‘산 자의 편안함’을 위해, 정작 이들과 함께 하고픈 이들의 넋이 서리고 담긴 곳이 아닌 자리에서 말이다.
2014년 잔인한 4월이 지난 뒤 그 잔인함보다 더 무서운 무관심 속에 ‘이들의 6월’은 그렇게 또 지나고 있다.
※ 본 취재가 이뤄질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신 무공수훈자회 김달기 회장, 김병수 자문위원, 6·25 참전유공자회 여주대 회장, 정한규 부회장, 대한민국상이군경회 남해군지회 정재득 지회장, 대한민국전몰군경유족회 박진국 회장, 남해군재향군인회 구재모 회장, 정용수 사무국장께 지면을 빌어 깊은 감사를 전합니다.
/정영식 기자 jys23@namhae.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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