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를 보다 눈물을 훔치기 일쑤였던 지난 한 주였다. 때로는 슬픔을 넘어 분노가 치밀고 그러다 바다에 가라앉은 세월호처럼 바닥에 촥 깔린 우울한 심경이 되기까지…. 하루에도 몇 번씩 이같은 심경의 사이클이 반복되고 또 반복됐다.
필자 뿐만 아니라 지난 한 주간 모든 국민이 보냈을 지난 한 주는 고통의 시간이었고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자식을 둔 부모의 심정으로, 그리고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었을 세월호 침몰 희생자와 실종자들의 안타까운 사연과 행여나 기적이라도 있기를 하는 마음에 하루 종일 뉴스 화면 한 켠에 적힌 사망자와 실종자의 숫자에 눈을 박아두고 있지만 ‘구조 174명’의 숫자는 꿈쩍도 하지 않고 실종란에 있던 숫자가 줄어 사망자 수로 옮겨가기를 하는 날이 지속되고 있다. 개인 SNS 프로필창을 ‘하나의 작은 움직임이 큰 기적을 만든다’는 글귀가 쓰인 노란 리본으로 바꿔 놓아도 슬픔이 가시질 않는다. 가슴에 차오르는 분노가 가라앉지 않는다.
더욱 화가 치미는 대목은 화창한 봄날 채 봉우리를 피워보지도 못한 꽃들이 차디찬 바다 속에서 처참히 꺾여 나간 점이고 수많은 아이들의 생사조차 상관조차 없다는 듯이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며 수많은 승객들의 목숨을 팽개쳐 버린 선장과 일부 선원들의 행동, 그 중에서도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할 ‘국가’의 무능과 부재가 열거할 수 없이 튀어나온 점이다.
특히 사고해역의 조류가 약해지는 소조기에 그나마 본격적으로 이뤄진 인양작업 중 세월호에서 건져진 아이들 상당수가 손가락이 골절되거나 손 밑이 퍼렇게 멍이 들었다는 보도를 접했을 때는 차디찬 바다 속 끝을 알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살기 위해 수없이 벽을 긁었을 이네들의 모습이 눈 앞에 보이는 것 같아 목이 메고 먹먹해진 가슴을 억누를 길이 없다. 이 땅에 어른으로 살면서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과 참담함에 고개가 절로 떨궈진다.
그렇게 전 국민이 같은 심정으로 바라고 또 바랐지만 더 이상 기적은 현실에서는 일어나기 힘든 요원한 일처럼 느껴진다.
처음 사고 소식을 접했을 당시 부산에서 열린 언론인 교육에서 만난 지역 일간지에서 잔뼈가 굵은 선배 언론인은 이번 사고를 두고 ‘21세기 선진국이라던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19세기급 후진국형 참사’라고 표현했다. 또 이번 사고의 책임을 모두에게 전가하는 순간 이번 사고를 진정으로 책임져야 할 누군가를 또 구제해 주는 것이라는 말도 했다.
백 번 공감한다. 지난 한 주간 이 사고를 두고 정부와 이른바 사회지도층 인사들은 부적절한 언행과 미숙한 대응으로 결국 대한민국이 표류하다 침몰했다는 외신의 일침에 당했고, 언론은 이같은 정부의 혼선을 지적하면서도 스스로 국민의 신뢰에 담을 쌓는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보도와 속보경쟁에 몰두해 중요한 언론윤리와 원칙을 스스로 저버리는 우를 범했다.
세월호 사고는 단순한 참사가 아니다. 오늘의 대한민국 전체에 대한 경고다.
특히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고 보호해야 할 의무를 진 ‘국가 시스템’에 확실하게 들어온 ‘노란 경고등’이다. 정부 등 중앙 부처와 국회의 몫이자 가장 국민들과 가까운 기초자치단체에 보내는 경고가 이번 세월호 참사다.
이번 사고 이후에도 사후약방문식 ‘중앙부처발 지방정부착’ 각종 안전점검이 하루에도 몇 차례씩 이어진다. 늘 대형참사가 있을 때마다 이어져 온 너무도 익숙한 그림이다. 당장 세상을 다 뜯어 고쳐 놓을 것처럼 떠들썩 하지만 또 참사가 반복되고 또 원인은 앞서 참사 당시에도 언급됐던 내용들이다.
가장 국민과 가깝게 소통하는 지자체 공무원들의 뼈저린 공감과 참사 재발방지를 위한 지속적이고 꾸준한 개선 노력이 절실한 이유다. 공직사회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 모든 전권을 책임지고 수행할 지역 일꾼들의 역할도 이에 못지 않다. 이제 더 이상의 후진국형 참사는 없어야 한다. 희박한 가능성이지만 가슴 한 켠 달아놓은 노란리본의 의미처럼 기적처럼 세월호 실종자의 생환소식이 들려오길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삼가 세월호 침몰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희생자들의 명복을 기원하며 유가족에게도 깊은 애도와 위로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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