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농협대학 거쳐 농협중앙회 재직
농작물재해보험 탄생 주역… “농민 잘사는 남해” 강조

이윤원 재경 남해읍 향우회장은 고향이 남해읍 평현 마을이다. 그의 삶을 보면 억척스러운 도전이면서도 여유로움과 아름다움이 묻어난다. 가난을 숙명처럼 타고났으면서도 그 가난을 탓하지 않고 자신의 노력으로 극복해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남해사람이 항상 자랑하는 ‘남해인의 표상’ 같은 모습을 가진 이가 바로 이 회장이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이 회장은 여러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든다.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따라 땔감나무 장사를 한 것이 그 기억의 첫 번째에 놓여있다. 주로 어머니가 솔갈비를 팔면 그는 옆에서 소위 ‘껄티’(stock)를 팔았다고 한다. 언젠가 나무 껄티를 한 아주머니에게 250원에 팔고 그것을 아주머니 댁에 실어다 주었는데 알고 보니 놀랍게도 담임선생님의 사모님이었다고 한다. 담임이 250원을 더해 500원을 주어 그 돈을 받기는 했지만 너무 부끄러워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고 한다.
가난이 지긋지긋해 기억하기 싫은 때도 많다. 하지만 지게 지고 땅 갈고 농사짓던 그 시절은 이 회장을 농업과 운명적으로 엮이게 만들었다. 가난은 그에게 농협대학을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이 회장은 땔감나무 파는 일 때문에 고교 3학년 때 진주 대입예비고사장에도 전날 친구들과 함께 가지 못하고 당일 첫 차를 타고 가서 시험을 겨우 보았다고 한다. 그해 예비고사를 통과한 사람은 소수였다. 남해농고(현 제일고)에서는 이 회장을 포함해 7명에 불과했다. 그 7명 전원이 농협대학에 응시했지만 이 회장 혼자 합격했다.
이 회장은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나 나 스스로는 별로 내세울 것이 없다. 다만 그동안 농협에 근무하면서 내 천직이라고 여기며 열심히 살았다. 더 이상 미련과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천직이라고 생각한 농협중앙회에서 그는 어떤 직원이었을까.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고 또 본인이 내세우는 것을 꺼려 묻혀 있었을 뿐이지 이 회장은 농협중앙회 조직 내에서 작은 신화를 창조한 인물로 통한다.
이 회장은 농협대학 졸업과 동시에 농협과 인연을 맺었다. 그가 농협에서 본격적으로 능력을 발휘한 것은 농협 인사의 꽃으로 통하는 농협중앙회 농작물보험기획팀장을 맡게 되면서부터다. 실제로 현장에서 힘들게 생활하는 농민들의 고충을 덜어주고 농업발전을 위한 아이디어를 기획해 실현할 수 있는 부서이기 때문에 기획팀은 농협 직원이라면 누구나 탐내는 부서다.
당시만 해도 농협 내에서 농작물재해보험에 무관심한 상태였다. 이런 조건에서 이 회장은 국내 최초로 농작물재해에 시달리는 농민들을 위해 농작물재해보험제도를 도입했다. 이어서 그는 농작물재해제도 개선뿐만 아니라 보험제도의 활성화 및 정착을 위해 보험대상품목 확대, 무사고 할인, 할증제도 등을 추진하는데 기여했다. 그가 입안한 ‘농업인 안전보험’, ‘가축보험’, ‘농기계 보험’ 등으로 농민들은 보험료의 50%를 국고에서 지원받는 혜택을 받게 되었다. 이 회장은 이 공로를 인정받아 2003년 4월 ‘농림 유공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 회장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보람을 느낀 것은 농협중앙회 남해군지부장으로 재직할 때다. 평소 고향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특별했기에 남해지부장 근무를 자청했다. 남해의 풍습과 실정을 잘 파악하고 있는 농업전문가가 고향 근무를 하는 것은 남해농업 발전에 큰 보탬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매일 시장 곳곳을 직접 찾아다니며 상인들의 의견을 듣고 격려도 하며 혼신의 힘을 쏟아 지난날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꿈꾸었던 농촌경제살리기 운동을 열정적으로 펼쳤다. 그가 남해지부장 시절에 바쳤던 헌신적인 열정에 대해 남해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이 회장은 농협중앙회 봉천동 지점장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관악구소방협의회 위원과 관악구재향군인회 이사로 폭넓게 활동하였다. 그는 농협중앙회 봉천동 지점장을 마지막으로 현직에서 은퇴하여 현재 재경남해읍향우회장을 맡아 재경 향우들과 함께 고향 발전을 위해 노력하면서 각종 사회봉사활동에도 헌신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 회장은 농협 재직 중 한국방송통신대, 경남대 대학원, 건국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이 회장은 농협대학에서 1998년부터 현재까지 보험론 겸임교수로 재직하며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농협중앙회 퇴임 후에는 농협은행 감사역과 남해농협 사외이사로 참여하기도 했다.
이 회장은 기회가 되면 고향에 내려가서 농민과 호흡을 같이하면서 고향과 농업발전에 기여하고 싶어 한다. 어렵긴 해도 30년 전에는 남해의 농어민들은 타 군 못지않게 잘 살았는데 군세가 왜 이렇게 약화되었는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단다.
“농어민은 그간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어왔다. 현재 무엇이 문제인지 분명한데도 어느 누구도 이를 해결해 주지 못했다. 행정이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투자도 확대하고 소득도 높여야 한다.”
이 회장이 생각하는 시급한 과제는 힘들게 생산한 농산물을 제값을 받도록 해 농어가 소득을 높이고 교육, 의료, 교통 등 생활여건을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남해 발전의 밑바탕이다. 이 회장은 고향의 농어민과 함께 이 일을 꼭 해보고 싶다고 한다.
이 회장은 가정 또한 주위의 부러움을 받기에 충분하다. 중견 수필가로 알려진 그의 부인 김미옥씨는 고향의 따스한 정서를 담아 수필집 <숨어 피는 꽃>, <행복한 만남>과 시집 <종이컵>을 출간했다. 이 회장 부부에게는 3명의 딸이 있다. 첫째 지영씨와 둘째 현영씨는 결혼해서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있고, 셋째 빛나리씨는 화장품 회사인 ‘네이처리퍼블릭’ 교육부에 근무하고 있다.
/윤혜원 서울 주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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