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제일고등학교 2학년

           박  현  옥   

고2가 되었다. 고1 때와는 조금 다른 여유와 조급함이 동시에 찾아오는 그런 고2가 되었다.

 그리고 어김없이 푸른이의 한마당도 함께다. 봄이면 잊지 않고 꽃망울을 터트리는 개나리처럼 말이다.


1학년 때의 나는 푸른이의 한마당이라는 축제 자체가 금시초문인 학생이었다.

사는 동네가 동네인지라 읍내까지 나오는 게 까다로운 편이었고 거기다 중학교에서는 스쿨버스가 운행되어 굳이 읍 사거리를 활보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고등학교에 진학을 했고 새로운 교정, 새로운 선생님, 교복, 교과서 등등에 익숙해져 갈 무렵 동아리에서 푸른이의 한마당이라는 낯선 이름을 들었다. “아~그거”하며 아는 체를 하는 동아리 회원들 속에서 물음표로만 일축하던 나는 옆에 앉은 친구에게 물었다.

청소년들을 위한 축제라고 한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를 친구들은 새삼스러울 게 있냐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그래 나는 호기심 반 놀라움 반 그 해 겨울 푸른이의 한마당을 겪었다.


축제라는 게 머리털 나고 처음이었던 17세의 나는 여기저기 정신 없이 돌아다니며 골든벨에 참여하고 울타리를 색칠하고 그림도 그리고 남들의 노래 솜씨도 들으며 박수치고 패션쇼를 바라보며 환호성도 질렀다.

푸른이의 한마당을 체험해보고 난 첫 느낌은 말 그대로 ‘정신 없음’ 이었다. 그래도 나중에 혼자서 생각해보니 슬며시 입 꼬리가 올라가는걸 막을 수는 없었다. 다른 사람은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너무나 강렬했던 기억 중 하나로 마음속 깊이에 자리잡고 있으니까.


17세, 그 짧은 내 생애 속에서 기성세대만의, 그들의 문화가 아닌 건 그것이 최초였다.


물론 주최는 우리가 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 외에 행사를 구성하는 건 거의가 청소년들이었고, 군내 여러 학교의 학생들, 동아리들이 참여해 성심 성의껏 모두들 열심히 제 맡은 바 역할을 다 하였고 나머지 학생들도 짜증 없이 따라주었다.


푸른이의 한마당은 청소년으로 시작해 청소년으로 끝나며 어른들은 문자 그대로 단순한 지도만 하였고, 온통 학생들이 떠들고 학생들이 밤늦도록 거리를 활보하며 학생들이 치우고, 꾸미고, 정리하는 우리들만의 그런 곳이었다.


앞에서 정신 없이 지나가버렸다고 했지만 그래도 한가지 확실히 남은 건 있다.


우리 동아리가 했던 울타리 만들기이다. 학교 가는 길목에 턱 하니 줄줄이 늘어 서있는 그 것들의 모양새를 보노라면 그 때 울타리 그림에 관한 자잘한 다툼이나 색칠하다가 난리 쳤던 일이 몽글몽글 떠오르기도 해서 푸른이의 한마당을 다시금 되새겨 주곤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럴 때마다 “저게 내가 그린 거야” “저건 또 어떻고” 하며 즐겁게 친구들끼리 웃으며 다가올 우리들만의 축제를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 청소년에 관한 그 어떤 백마디 설교보다도 확실한 게 바로 행동이 아닐까 한다. 발전에 시간의 존재여부가 전제되어지는 것처럼 모두들 올해는 조금푸른이의 한마당을 기대하고 있다. 그러한 기대에 걸맞게 축제도 조금씩 달라지며 진보하고 있다. 


그리고 굳이 이런 것이 아니라도 그것들은 매번 달라져야 한다. 왜냐, 그것은 축제의 주체인 우리가 청소년인 까닭이다.


우리 청소년들이 푸른이의 한마당이란 축제의 주인이 된다. 진정한 우리 청소년들만이 총체가 되는 축제를 말이다.


아직 행사까진 몇 주가 남았지만 기획단을 맡고 있는 우리 학교나 남해고등학교, 정보고등학교나 기타 군내 많은 학교에서 끼 있고 참신한 여러 청소년들이 참여하여 이번 푸른이의 한마당을 재밌게, 또 새롭게! 이뤄내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골몰하고 있다. 이번엔 또 어떤 이벤트를 벌이나, 학생들을 또 어떻게 유쾌하게 만들어 주나 하면서.


나는 아직 꿈꾸는 청소년이다. 아직 꿈을 꾸는 친구들과 또 다른 동생들, 언니들, 오빠들과 함께 꿈으로 지어진 푸른 들판에서 우리들만의 작은 파티를 지속시켜 나가고 싶다.


푸른이의 한마당이라는 작고도 큰 축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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