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해방 후 고향 남명국민학교를 졸업하자, 부산으로 유학가 중학교 3학년 때 6.25전을 맞이했다. 동년생보다 3년 늦게 진학하였지만 나이는 19세였다. 고향선배 K씨는 부산에서 대학에 재학하고 있었고, 우리 모두 집안이 가난하여 고학을 하고 있었다. 방학 때되면 책 몇권과 빨래 옷 보따리를 들고 부산-여수간의 야간 여객선을 탄다. 배표(승선)값이 없어 부두에 정박한 여객선에 몰래 승선하고, 배가 출항하면 서기선원이 돌아다니며 배표를 점검한다. 그 선원의 얼굴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숨바꼭질을 한다. 그 시간을 요행히 넘기면 선실밖에서 쭈그린채 잠을 자고, 새벽에 남해 노량부두에 내린다. 버스가 있을리 없다. 걸어서 읍에까지, 읍에서 남면까지 약 60리, 이렇게 고된 귀향길도 고향을 가는 기쁨이 피곤한 줄 모르고 노래와 잡담, 웃음을 보낸 후, 부모의 얼굴을 맞이한다. 우리향우 세 사람은 6.25전을 맞이하여 R친구와 나는 부산에 남아 있다가 50년 9월 1일에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하였고, K선배는 여름방학에 고향에 내려가 있었다.
 R군은 국군야전병원에 배치되었고, 나는 미8군 야전공병대대에 배속되어, 이북함경도만 빼고는 한반도를 4년간 누볐다. 51년 어느  날 고향에 휴가를 가서 K선배를 만났다. K선배는 그간 어떤 생활을 했던가를 알게 되었다. 남해군에도 인민군이 진입하여 읍에서 인민재판을 했다는 것이다. K선배는 당시에 대학생이었기에 남해출신으로서는 선망의 학생이었다. 그런 그가 인민군 의용대 조직의 서기직을 맡았다는 것이다. 그는 나와 오랜 교제기간에도 사상적인 언질은 한번도 없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그런 직책을 맡았던가를 알 수 없었다. 인민재판에 회부된 인물은 어떤 일을 했던 사람이 대상이 되었는지 잘 모르나, 그 지역의 인민군책임자의 명령에 의해서 대상자를 색출하는 때였으니까, 개인 간의 감정문제로 인한 사람, 재산이 넉넉한 사람, 관직에 있었던 사람, 지역의 유지급 인물 등을 대상으로 한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K선배는 이웃고향의 유지급 한 분이 인민재판의 대상이 되었던 것을 알고, 그 분에 대한 인품과 경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재판대상이 될 수 없다고 배제시켰던 것이다. 그 분은 위기를 벗어난 것이다. 그 이후 인민군이 후퇴하자 그 선배도 지리산까지 후퇴하여 북으로 가는 길에 이탈하여 잠복해 있다가, 어느 날 밤에 고향집에 몰래 와서 숨어있었다. 그의 동료가 체포되자 정보가 알려져 군첩보대에 의해서 체포되었다. 첩보대의 상관이 역시 이웃고향의 그 유지급 인물의 아우였다. K선배는 과거의 그 행위를 반성하고, 첩보대원의 신분으로 변신하여 군의 업무에 종사하다가 제대했다. K선배가 자수한 후 잠깐 집에 왔을 때 휴가차 집에 갔던 나는 막걸리 한 주전자를 사서 K선배와 부모를 위로했다. 힘없는 사람들이 살상적 침략권력에 의해서 자의 또는 타의의 희생자가 되던 때에 그 아픔을 위로한 것이다. 그 선배는 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구제받은 고향어른도 세상을 떠났다. 나의 형은 2급상이군인, 사촌형은 전사, 문중조카 한 사람도 전사, 마을선배 한 사람과 친구 한 사람도 전사했다. 살아 돌아온 나는 전사한 사람들을 생각 할 때마다 몹시 슬퍼 괴로웠다. 지금의 우리시대는 해방 후의 좌우가 싸우던 혼란기를 연상하게 한다. 이런 때의 남해군민과 향우들은 정치나 정책을 초월하여 서로 돕고, 사랑하며, 존경하며 살아가는 인간미를 간직하는 것이 6.25전을 교훈 삼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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