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창간준비호 발행, 이듬해 ‘남해정론’으로 시작

당시 주요관심사 농어업, 정치, 높은 교육열도 엿보여

 

현재의 남해신문(주)는 1990년 5월 10일부터 창간준비호를 발행하고 다음해인 1991년 1월 10일부터 ‘남해정론’이라는 이름으로 지역언론으로서의 첫 발걸음을 내딛었습니다.

맨위의 사진은 남해정론 창간호의 1면입니다.

마감으로 졸린 새벽이지만 합본호를 한 장씩 넘기면서 20여 년 전 남해의 모습과 소식을 보고 읽는 재미에 잠이 달아납니다.

‘이것 좀 보라’며 주위사람들까지 귀찮게 할 정돕니다.

제가 알고 있는 분들의 모습도 간간히 보입니다.

지금과는 모습이 많이 다르지만 20년 전에는 모두 꽃미남, 꽃미녀입니다.

1991년도의 신문에는 주로 농어업, 도로나 주차장 같은 생활제반시설과 관련한 기사들이 유독 눈에 많이 띕니다.

또 다른 당시 주요관심사로는 ‘정치’였으며 ‘남해는 예부터 교육열이 높았다’는 말을 실감케 할 정도로 교육에 관한 기사도 많았습니다.

이웃들의 소소한 얘기, 군민들의 기고도 신문의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많고 많은 당시의 남해군의 이야기 중 몇 가지를 소개해 봅니다.

그 첫 번째로 ‘우리는 어디서 놀아야 하나요?’라는 기사입니다.

방학을 맞은 학생들이 놀 곳이 마땅치 않아 ‘전자 오락실’에 모여든다는 내용입니다.

이 기사에서는 학생들은 평소에는 일주일에 한 두 번 정도 오락실을 찾는데 방학 때에는 2~3일에 한 번 이상을 방문하고 오락기기의 내용이 파괴적이라고 설명하며 건전한 청소년 놀이공간의 확충과 놀이문화의 보급이 필요하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도 지난 2010년도에 군내 청소년들이 방학은 물론 평소에 놀 공간이나 갈 곳이 없다는 기사를 쓴 적이 있는데, 예나 지금이나 학생들이 놀 공간은 없는가 봅니다.

학생들이 즐겨하는 요즘의 게임과 20년 전 오락실 게임을 비교하면 그 내용은 천지 차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요즘 게임들의 잔인성을 생각해보면 당시 게임은 ‘새 발의 피’ 같습니다. 20년 후에는 지금보다 더 잔인한 게임이 나올지 궁금합니다.

두 번째로 남해인구에 관한 기사입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줄어드는 인구에 대한 걱정입니다.

1990년 남해 인구는 7만 1400여명으로 89년 보다 7252명이 줄었다고 합니다. 1년 사이에 7천명이면 정말 엄청나게 줄었네요.

기사에서는 남해군에서 발표한 인구주택 총 조사 결과에 따르면 여성보다는 젊은 남자들이 군내 전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농촌을 떠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 당시에는 고령으로 돌아가시는 분들보다 성공과 야망을 찾아 도시로 떠나는 젊은 분들이 많았겠지요.

마지막으로 교육기삽니다.

예전의 남해종합고등학교, 지금의 경남도립남해대학 밑으로는 우회도로가 지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남해종합고등학교 우회로 관통에 대해 군문들의 반대가 매우 거셉니다.

기사 사진에는 ‘교육환경보전’, ‘군민모두의 학교’, ‘아름다운 우리 학교를 지켜서 물려주자’ 등의 현수막을 들고 시위를 하는 군민들이 보입니다. 군민들의 학교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느껴지는 기삽니다.

흥미롭고 알려드리고 싶은 기사들이 많지만 지면의 한계 상 여기까집니다.

창간 22주년을 맞아 1991년도의 합본호를 꼼꼼하고 자세히 읽어보니 먼지가 수북이 쌓인 오래된 집안 앨범을 보는 느낌입니다.

1991년도 ‘남해정론신문’ 합본호를 소유하고 계시는 분들은 많지 않을 거라 예상됩니다.

찾아보기가 힘들겠지만 기회가 된다면 꼭 한 번 보십시오. 앨범을 보듯 얼굴에 미소도 번지구요. 아주 재밌습니다. 함께 보면 더 재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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