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터널을 지나온 기분이다. 터널을 지나온 이들의 찬반 성향이나 관점에 따라 터널을 빠져나온 느낌이 밝다 느끼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터널 속의 어둠 못지않게 짙은 안개에 다시 둘러싸인 듯한 답답함을 느끼는 이들도 있을 터이다.
지난 약 3개월여의 시간동안 화력발전소 유치와 관련한 논란은 크고 작은 지역의 타 현안들을 모조리 빨아들이는 블랙홀과 같은 존재였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군민들은 물론이고 화력발전소 유치 문제를 다룬 지역 언론들도 각자의 논리에 따라 짧은 기간 심하게 몰아친 격랑에 부침(浮沈)해야 했고 이제는 비로소 본지를 포함한 언론 스스로 각자의 닻줄을 매야 할 항구에 다다른 상황이 됐다. 지금이야 제각기 제 좋은 곳에 제 닻줄을 내렸다 판단하겠지만 결국 이에 대한 최종 판단도 군민과 독자들의 몫이 남았다는 점에서 언론 스스로도 아직 항구에 정박했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에는 이르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화력발전소 유치 논란은 우리에게 분명 ‘갈등’이라는 쓰리고 쉽게 치유하기 힘든 상처를 남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이 과정에서 우리는 ‘남해’라는 고향, 너와 나의 삶의 터전을 두고 ‘옳고 그름’이 아닌 ‘다른’ 관점에서 자신의 고향, 삶의 터전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나눴다는 것을 서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갈등을 봉합하고 찢긴 마음을 다시 이어붙이는 화합은 그래서 중요하고 이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이어져야 함은 두 말할 나위 없다.
화력발전소 유치 논란은 짧게는 30년 전의 과거를 들춰내기도 했고 다시 50년, 길게는 백년 미래라는 말에 녹아 시간을 넘나드는 거대담론을 구축했다. 1%의 개발로 99%의 성장이라는 논리로 시간에 공간의 개념이 더해져 담론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여기에 현실적 우려와 기대, 미래의 예측할 수 없는 수많은 우려와 또다른 기대가 병합돼 혼란을 넘어 장래를 예측할 수 없는 카오스(혼돈)를 연상시키는 상황도 수 차례 겪었다.
다소 수업료가 비싸다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지만 분명 지역 발전을 위한 홍역을 치룬 것이고 한 단계 성장하는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성장통을 겪은 것이다.
어쨌거나 주민투표라고 하는 군민 총의를 수렴하는 과정을 거쳐 화력발전소 유치 논란을 둘러싼 길고 긴 논란의 마침표는 찍었다.
그리고 이번주 신문의 각 지면 기사들을 고민하며 이제 그 거대담론에 가려 보지 못했던 우리의 현실에 다시 눈을 돌려야 할 시기가 다시 찾아왔음을 실감했다.
달포 전부터 9면에 고정 연재해 온 ‘남해군체험마을 일류를 넘어 명품으로 가는 길’에 담긴 체험마을 발전방안을 고민하는 세 번의 기사, 17면 남해바래길 관련 기사에 소개된 하순옥 씨의 사연을 보면서 이제 화력발전 유치 논란에 묻혀 발하지 못했던 우리 주변의 작은 가치부터 다시 찾아내는 작업이 필요함을 절실히 깨닫게 됐다. 또 이번주 남해시론에 실린 양왕용 논설위원의 ‘다함께 새로운 블루오션을 찾자’라는 글에 담긴 원점부터 다시 찾는 뼈아픈 노력이 이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새롭게 다지게 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금 시점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화합’의 가치를 떠올리며 하동 악양면 평사리 들판을 지나 조씨 고가로 가는 길, 지리산 형제봉 자락 야트막한 언덕빼기에 자리잡은 노전마을 11천송의 모습을 눈 앞에 다시 그려본다.
멀리서 보면 하나의 아름드리 예쁜 수형의 고송(孤松)이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아래서 보면 높이도 모양도 다 제각각인 백년 수령의 소나무 11그루가 모여 어느 쪽에서 보더라도 편안한 반구형 수형을 보여주는, 제각각의 나무 그루그루의 모습이 엮어져 만들어낸 공생과 상생의 조화로운 풍경.
이제 우리도 그 나무를 닮아야 할 시기다. 관점도, 생각도 달랐지만 제각각 고향 남해의 발전을 위해 고민했던 그 열정을 모아 주변의 작은 나무를 키워 아름드리 숲을 이루는 마음으로 흩어져 있던 각자의 마음과 지혜를 다시 모아야 할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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