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선사람들의 도전정신이나, 창의성 그리고 생활력을 표현하는 말들로 고춧가루 먹고 물밑을 잠수하는 이야기나  창선-남해-하동 사람을 비교하는 이야기들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들이다. 따라서 여기서 그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창선 사람들의 정신을 가장 잘 실현한  고 광호 조소수(1912-1988)옹과 그의 큰 아들 조상권 (1936-) 씨 그리고 막내 아들 조태권(1948-)씨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겠다. 사실 이 세분들을 필자는 한 번도 만난 적은 없다. 그러나 조소수 옹의 경우 1997년 78세의 나이로 돌아가신 필자의 선친으로부터 우리 마을의 입지전적 인물이면서 동시에 엉뚱한 일면이 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조 옹 은 일제 강점기 초기에 필자의 고향인 창선면 면소재지인 상죽리 평범한 농가의 3형제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젊은 시절 일본에 건너가 동경에서 자수성가하여 재산을 형성하였으며 해방 이후에는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사업가로 명성을 얻었다.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니  조 옹이 국내의 신문기사로  둥장한 것은 1954년 4월 4일 자 경향신문에 동경 환일무역주식회사 대표로 내방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1962년 8월 31일 자 역시 경향신문의 기사에 의하면 사진과 함께 그해에 난 전남 순천지구 수해 의연금으로 5천원을 귀국한 여비를 아껴 기탁하고 있다. 같은 지면에 CAT 항공사 한국 지사대표 역시 사진과 함께 5천원을 기탁하였다. 이 일은 모두 1965년 한일국교가 정상화가 되기 전의 조 옹의 행적이다.  이렇게 무역회사 사장으로 동포애가 남달랐던 그는 해방되기 직전인  1945년 1월부터 무역업에 열중이면서 한편으로는 일본 도예계의 명사 문하에서 도자기 연구하였다. 그런데 그 연구는 단순한 도자기 연구가 아니고 우리 나라의 전승 도자기를 재현하기 위한 연구였다. 그러다가 그는 1963년 조선 왕실에 진상하던 도자기를 굽던 광주관요의 유서 깊은 전통과 장안 정신을 이어 받겠다는 일념으로 다른 두 사람과 함께 경기도 이천에다 광주요를 설립하게 된다. 이것이 오늘날 경기도 이천을 도자기의 본고장으로 만들게 되는 첫 걸음이었던 것이다.
   필자는 애석하게도 광주요를 차를 타고 지나치기는 했으나 들어가 본 적은 없다. 다행히  필자의 아내가 그 근처에서 있었던 행사에 출장을 간 적이 두 번  있어서 그 때마다 행사의 프로그램 속에 들어 있는 광주요 탐방을 해서 그  규모의 방대함과 전시된 도자기 모양의 독특성을 간접적으로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필자의 초등학교 여학생 동기 중에 조 옹의 큰 형님의 손녀가 있어서  듣기도 했으며, 바로 윗 형님의 손자가 광주요에서 도예를 배워 도예가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필자의 아내는 광주요를 가 보지도 않고 글을 쓴다고 핀잔을 주기도 하나 우선 가 보는 것은 뒤로 미루고 글부터 쓰기로 한 것은  조 옹도 그렇지만 그의 두 아들이 최근에 화제의 인물이 되어 신문과 방송에 오르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막내 아들인 조태권 광주요 대표가  최근에 쓴 <조태권의 문화보국>(김영사)이라는 책 가운데 ‘대한민국의 숙명’이라는 장章에서 삼남 삼녀 가운데 막내인 그가 가업인 광주요를 이어 받게 된 과정을 회고하면서 비교적 자세히 광주요의 설립과정과 조 옹이 광주요에서 맡은
역할과  그의 광주요 설립정신을 밝히고 있다. 조 옹은 말하자면 황금알을 낳는 규모가 큰 무역업을 접고 민족혼이 서려 있는 도자기 사업에 투신한 것이다. 그러나 고려청자와 이조백자의 기법을 재현한 도자기들의 애호가는  그 당시로서는 한국에는 없었다. 오히려 일본인들이 큰 관심이 있어 광주요를 찾기도 했다. 조 옹은 이에 착안하여 1971년 광주요의 상설 전시관을 일본 동경에 개설하였으며, 그 해부터 1988년 조 옹이 작고할 때까지 18년 동안 무려 279회라는 기록적인 전시회를 일본 전역에서 개최하였다.  그  마지막 전시회가 끝나는 날인 1988년 2월 4일 그는 경기도 이천군 신도면 수광리 자택에서 향년  76세로 미망인과 육남매를 남겨두고 이 세상을 떠났다. 그 날은 광주요가 창업된 지 25주년하고도  하루가 지난 날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창선사람 특유의 개척정신으로  그의 후반기 26년을 우리 나라 전통 도자기 보급, 그것도 임진왜란 때 조선 도공들을 붙잡아 가 도자기의 선진국으로 탈바꿈한 일본 사람들에게 한국 도자기의 우수성을 깨우쳐 주다가  목숨을 다한 것이다.

  조소수 옹의  장남인 조상권(1936-) 광주요 도자문화 연구소장은 최근에 유럽에서 더 유명한  도예가이다. 그런데 그의 운명은  정말 기구하다. 2009년 10월 24-25일 조선일보 토일 섹션 <Why?>에 <문갑식의 하드보일드>라는 2면 반에 걸친  인터뷰 기사에 “나는 북한 공작원이었다”라는 제목 기사의 주인공이 바로 그이다. 사실 필자의 고 조소수 옹 3부자에 대한 관심은 이 기사에서 비롯되었다. 인터뷰에서 창선이 고향이라고는 밝히지 않았으나  남해라고 한 점과 선친의 이름이  밝혀져 있었는데  그 이름이 나의 기억에 남아 있어 추적해 본 결과  우리 동네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일제 강점기 아버지가 사업을 하던 일본 동경에서 태어났다.  그는 해방 후 그의 아버지의 재력에 힘 입어 첫 번째 귀국선을 탔다. 그는 삼천포와  부산에서 잠시 살았으며 경남중 2학년까지 다니다가 육이오전쟁이 터지자 장남의 안전을 위하여 조 옹이 그글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보냈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친과 마찰이 잦았다고 한다. 전국을 홀로 방랑했으며,12세 때에는 혼자서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을 돌아보았다고 한다. 그는 법조인이 되겠다던 꿈이 스님으로 다시 미술학도로 변해갔다. 그래서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프랑스 파리 유학을 꿈꾸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반대하였다. 그러던 차에 아버지의 친구이자  4.19혁명 뒤 과도정부 수반을 지낸 바 있는  허정이 한일회담 대표로 1959년 일본에 왔다. 허정이 시무룩해 있는 조상권 소장의 의중을 파악하여 아버지를 설득하여 파리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말하자면 일본 미술대학생이 파리의 명문 사립 건축학교 유학생이 된 것이다. 그리고 예과를 거쳐 1200명중 1등을 한 명석함과 깐깐하기로 유명한 비비안이라는 보자르 건축학교 교수의 눈에 띄어  프랑스 정부 장학금을 받으며 더욱 유명한 보자르 건축학교로 옮겼다. 그러나 이러한 천재적인 건축학도에게 동백림 북한대사관의 마수가 뻐쳤다. 그는 1961년 2005년 작고한 부인과 이미 결혼한 몸이었다. 그리고 남매를 두었다. 서울대를 나와 유학 중이던 이미 북한에 포섭된 수학자의 권유로 동백림에 들어가 북한대사관의 환대로 1963년 평양을 거쳐 금강산을 방문하고 다시 파리로 돌아왔던 것이다. 물론 그의 아내는 울며 북한행을 반대했다. 1964년 두 번째 방문 때에는 노동당에 입당했다. 1967년 동백림간첩사건이 터지자  체포를 피해 가족과 함께 그는 우여곡절 끝에 평양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그는 도착 첫날  잘못 왔다는 것을 감지하고 아내와 함께 통곡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1972년 김일성 환갑 때에는 한 사람 남아 있는 고려청자 도공을 찾아 고려청자를 재현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간첩의 길을 강요받아 자녀들은 북한에 둔 채 부부는 1969년부터 일본인 부부로 위장하여 유럽을 다녔으며, 1970년대는 북한을 도피하기 위하여 남미에 머물며 공작원들의 여권세탁을 주로 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소환되어 들어가면 남매의 바닥생활을 짐작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결국 1990년대 동구가 무너지자 북한 공작원생활을 청산하기로 결심하고 1997년 한국으로 귀순한다. 이 과정에 1988년 부친의 가업을 이어 받은 12세 아래의 막내동생인 조태권 광주요 대표의 역할이 크게 작용했다. 말하자면 그는 자녀는 구출하지 못하고 부부만 북한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것이다.
  귀순한 1997년부터 그는 그의 막내 동생이 마련한 광주요에서 건축과 조각  그리고 한국의 전통이 결합한 독특한 도자기의 세계를 개척하면서 세계가 주목하는 도예가의 길을 걷고 있다. 그리고 그의 막내 동생의 염원인 예술적이고 품격 높은 생활 도자기의 제작에도 힘쓰고 있다. 서울에서의 몇 번의 전시회와 다도의 고향인 전라도 광주에서의 전시회 등 개최될 때마다 중앙지의 주말 세션에 크게 취급되고 있다. 그리고 금년 봄에는 프랑스 파리의 전시회도 계획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 속에는 그 동안의  기구한 생애와 북에 남겨둔 자녀에 대한 회한의 정이 담겨 있다.  비록 본격적인 도예가의 길은 환갑이 넘어서 들어 섰지만 그는 분명히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도예가가 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광주요에도 그의 작품의 전시공간과 작업실이 있겠지만 그의 유년기의 추억이 각인되어 있는 삼천포가 건너다 보이는 북창선초등학교 부지와 그 일원에 도예가 중심이 된  문화예술학교의 운영과  미술관 같은 시설을 세울 수 없을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미 앞에서도 부분적으로 언급했지만 조소수 옹의 3남 3녀 가운데 막내인 조태권(1948-) 광주요 대표의 활동도 앞의 두 분에 비하여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 그는 해방 후 부산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는 분명히 경남 남해 출신이라 되었다. 그 역시 일본 외국인학교를 거쳐 미국 미주리 주립대학 공업경영학과를 졸업했다. 앞에서 밝힌 그의 저서 <조태권의 문화보국> 그의 선친 이야기 바로 앞 부분에 그의 걸어온 일이 약간 소개되고 있다.     그의 창선정신의 진면목은 1969년 미국 유학 시절부터 여지없이 발휘된다. 들리지 않는 영어를 극복하기 위해 책을 모조리 외운 것이라든지, 미시간 호수 근처의 호텔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과정의 성실함이 바로 그것이다.  유학 후 일본에서 아버지의 도자기 일본 전시를 도와주자 가업을 이어라는  아버지의 강권을 뿌리치고 귀국하여 대우실업에 입사하는 과정 역시 고춧가루 먹고 잠수하는 창선인의 기질이 그대로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는 1988년 조소수 옹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표현대로 운명적으로 가업 광주요를 맡게 된다.
  그는 광주요를 맡자 대한민국 최초의 고품격 생활도자기를 개발한다. 기존의 도예가들이 대부분 실용성이 없는 예술도자기를 고집하고 있는 풍토에서 그의 전통 도자기의 생활화는 정말 대단한 혁명이었다. 그 만큼 반발도 컸다. 그러나 그는 한식의 고급화라는 새로운 도전을 도자기에 접목하여 다른 사람들은 도저히 시도할 수 없는 사업을 하고 있다. 그래서  ‘가온’이라는 최고급 식당도 운영하였고 고급술 ‘화요’도 제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사업은 전통의 현대화,  한식의 세계화라는 철학과 가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구상과 집념이 현재  이명박 대통령의 영부인 김윤옥 여사가 열정적으로 펼치고 있는 한식 세계화 사업의 이론적 근거와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 사업의 방향이 변질되자 오히려 비판적인 입장을 표명하였다.   이상과 같은 그의 기업 경영 철학이 담긴 저서가 <조태권의 문화보국>이다. 그는 최근에 사업의 구조조정을 단행했다고 하나 그의 도전정신은 끝나지 않고 있다. 그는 한식세계화에 600억원을 쏟아 부었다고 한다. 이렇게 개인 투자로는 천문학적 투자라고 할 수있는 투자의 좋은 이벤트가 2007년 칼리포니아 포도주의 집산지인 샌프란시스코 근처의  나파 벨리에서 포도주 생산 농장주를 초청 하여 베푼 만찬이다.
  2007년 10월19일 조태권 대표는 광주요에서 제작한 청자접시, 백자사발 굿그릇, 밥그릇 등1000여점의 도자기를  항공기에 싣고 심지어 홍삼물, 닭육수, 초고추장, 간장 등 음식물과 ‘가욘’의 요리사까지 데리고 나파 밸리 와이너리 50명을 초대하여 전채 ,다섯 코스 요리 후식이 포함된 만찬을  베풀었다. 당시 언론은 60여명이 참석하였는데 총 경비는 1억6천만원이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이를 계기로 우리 사회에 한식의 세게화  혹은 고급화라는 화두가 던져졌다. 그런데 이와 꼭 같은 행사를  금년 2월 10일 LA  코리아 타운  아로마센터 5층 뱅큇 홀에서 한인사회 오피니언 리더 50여명을 초청하여 베풀었다. 공교롭게도 이 장소는 필자가 금년 1월 초에 미국에 있는 큰 아들 내외와 함께 가 보았던 곳이고 나파 밸리 역시 지난 해  추수 감사절 기간에 가보았던 곳이다. 두 군데 다 품격 있는 신사 숙녀들이 모이는 장소였다.필자는 지금 그의 저서 <조태권의 문화보국>을 열심히 읽고 있다. 필자가 다 일고 난 뒤에는 한식 세계화에 관심이 많은 미국의 큰 며느리에게도 추천 할 작정이다.
  조태권 대표는 이렇게 한식 세계화 사업에 20년 동안 많은 돈과 정렬을 쏟았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2030년 이 되면 5000조원의 거대한 외식 시장을 누가 점령할 것인가에 그 국가의 명운이 달려 있다고 한다. 2015년 착공될 예정의 장포가 수우도를 징검다리 삼아 사량도와 다리로 연결되고 남해안 프로젝트 사업의 일환으로 입안되어 있는 국제휴양지구가 골프장을 비롯한 각종 해양 레포츠 시설과 최고급 관광호텔과 함께  장포를 비롯한 창선의 아랫산에  마련된다면 조태권 사장이 마련한 최고급 한식당을 비롯한 문화보국 산업 또한 이곳에 자리 잡게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해본다. 말하자면 조소수 3부자의 창선정신이 바로  그들의 고향에서 꽃피우게 될 것이라는 소망을 가져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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