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현마을에서 본 일출

 
  

여행 중 일출과 일몰의 타이밍을 놓치지 않은 것은 매우 중요하다. 맑은 날이라면 남해에선 어느 곳이든 가까운 산으로 올라가면 아주 인상적인 일출과 일몰을 감상할 수 있다. 주민들은 이구동성으로 일출은 물건마을이나 노구마을에서 맞이하는 것이 좋고 일몰은 평산이나 구미마을에서 보는 것이 아름답다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식의 수준을 뛰어넘지 못한 조언에 불과하다. 평소 내가 좋아하는 일출과 일몰은 끝없이 펼쳐지는 지평선 끝으로 타오르고 사라지는 태양이지만 남해에선 조금 다르다. 우선 낮은 곳보다는 높은 곳이 좋다. 새벽이면 어둠을 뚫고 바다인지 하늘인지 분간하기 힘든 크고 작은 섬들이 안개 속에서 깨어날 땐 어머니 뱃속에서 아기가 잉태되듯 검고 붉게 피어오르는 하루의 장렬한 시작, 나는 보리암으로 오르는 바위틈과 나뭇잎 사이로 떠오르고 지는 일출과 일몰의 장관을 잊을 수 없다. 이렇게 말하면 그것 또한 진부한 정석이 아니냐 반문할지 모르지만 내 경우 남해에서 뜨고 지는 해는 누가 뭐라 해도 금산에서 맞는 것이 가장 감동적이다. 올라보면 안다. 남해 최고 산, 금산의 바위들은 어느 것 하나 예사롭지 않다. 보리암으로 오르는 산대나무 숲으로 크고 작은 바위들은 금산의 위용을 그대로 품고 있다.  

  
 
  

해지는 사촌해수욕장

 
  

직전과 직후의 아름다움

사람이나 꽃은 만개 직전이 가장 아름답다. 절정의 예감을 그대로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출도 아름답지만 일몰은 더욱 그러하다. 아니 일출과 일몰 전후의 시간들은 경이롭고 엄숙하여 누구든 한번쯤 자신의 존재를 돌아보게 한다. 특히 일출은 어둠 속에서 랜턴을 들고 시작하여 천천히 걷는 산행동안 동쪽으로 하늘의 문이 열리고 수채화의 검붉은 물감이 서서히 퍼져 가는 듯한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살아있음의 실체를 새롭게 인식시킨다. 그렇게 어둠 속 보행으로 정상에 올라 떠오르는 해를 기다리다가 맞는 기분은 자신의 몸으로 걸어 누려본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성취감이고 행복감이다. 긴 기다림을 생각하면 수평선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는 해는 거짓말처럼 빠르게 올라선다. 그건 지는 해도 예외가 아니다. 해를 즐기는 사람은 절정의 짧은 순간이 아니라 절정 전후의 긴 기다림의 맛을 아는 사람이다. 태양이 지평선이나 산의 고갯마루를 넘고 나서 그 다음에 오는 하늘빛을 사랑할 수 없다면 그건 자신의 존재를 한번쯤 점검해 볼 필요가 있겠다. 뜨는 태양이 희망이라면 지는 태양은 존재의 숙연한 내리막길과 뒷모습을 생각하게 한다. 산다는 건 ‘어떻게 사느냐보다 어떻게 죽느냐가 문제’라는 누군가의 말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길 위의 여행자에게 지는 해는 존재의 답을 묻게 하지 않던가. 그리하여 일몰은 그 긴 기다림 때문에 더욱 깊고 장엄한 것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도심의 빌딩 숲으로 탐스럽게 지는 해를 보며 감탄하고 있는 내게 동행한 친구는 참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다며 핀잔을 주었는데 매일 뜨고 지는 태양인데 뭐가 그리 새로우냐는 것이었다. 친구가 뭐라든 말든 나는 아예 작은 신음소리까지 내며 넋을 놓고 있다가 한마디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에 해가 서너 번쯤 뜨고 진다면 이렇게 감탄하지는 않겠지!’ 그때 나는 운전 중이었는데 친구는 별종이라며 해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려주었다.어쩌다 만나는 도심의 일몰이 그러하듯 남해에서 뜨고 지는 태양은 나 같은 여행자에겐 일상에서 보아왔던 그 태양은 아니다. 바다에서 말갛게 얼굴을 씻고 올라온 해는 ‘태초’ 혹은 ‘순수’라는 단어를 연상시킨다. 신께서 매일 새로운 해를 뜨게 하는 건 인간들이 알고도 저지른 실수가 안타까워 그래도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건 아닐까? 남해에 있는 동안 그곳이 어디든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이면 가던 길을 멈추고 경이로운 의식을 취하듯 태양신에게 매번 예를 드려야 했다. 이 우주에서 태양보다 큰 에너지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압도되는 것인지도. 좁은 우리 국토, 그러나 청정지역 남해에서 만나는 일출과 일몰은 늘 새로운 축복이나 다름없었다. 용문산 자락에서 황토를 밟다가 만나는 어느 날의 일몰은 그 자체로 내게 모든 의미가 되었으니까.

/ 김 인 자 (시인·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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