낼 모레 아흔살, 아직도 꿈을 꾸는 작은 체구의 거인

이제는 많은 군민들에게도 너무나 익숙한 이름, 현위헌관.

한 평생을 일본에게 빼앗긴 우리 문화재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살아온 그의 인생사, 집념의 이야기를 이제 한 곳에서 보고 들을 수 있게 됐다.

읍에서 이동으로 향하는 길, 국제탈공연예술촌을 지나 약 100m 쯤 내려가자 하얀 대리석으로 마감된 크지도 작지도 않은 2층 건물이 눈에 든다. 현위헌관장학회 창립자 기념관이라 쓰인 긴 가로 현판이 방문객을 맞는 이 건물.

그 뿐만 아니라 아이들 교육을 위해 정든 이웃, 친지와 작별을 고하고 땀냄새 그윽히 배인 고향땅을 버리고 객지로 떠나야 하는 문중 친지들의 처지가 안타까워 대한해협 건너 일본 타향에서 고되게 벌고 모은 자신의 사재(私財)를 털어 장학사업을 펼치고, 이제는 그 뜻을 자신의 고향 남해 출신 모든 이들에게 매년 전해오고 있는 현위헌관 선생.

한평생 자신의 모든 것을 털어 빼앗긴 우리 것을 찾고자 했던 한 ‘섬나그네’, 이제는 청년 현위헌관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밀항선에 몸을 실었던 그 때 그 고향을 평생 그리워했던 향수를 지역의 후학과 함께 한국 현대사의 고락을 함께 했던 노인들에게 봉사와 헌신의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의 이야기가 이 건물 내에 그대로 담겼다.

다음주 토요일 11월 5일이면 오랜 준비기간을 거쳐 걸렸던 빗장을 풀고 방문객을 맞게 될 이 기념관 개관준비가 한창이던 지난 7월, 본지 기자가 당시 개관 초반 준비차 남해에 머물렀던 현위원관 회장을 처음 만났고 개관을 앞둔 지난 주 막바지 개관 점검에 남은 심혈을 기울이던 그를 다시 만났다.

▲“내가 했던 약속, 이제는 다 이뤘다”

“내가 했던 약속, 이제는 다 이뤘다. 이제는 그 약속을 더 키우는 일만 남았다”

작은 체구에서 품어져 나오는 카랑카랑한 목소리, 낼모레 아흔을 바라보는 노인의 음성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현위헌관 회장의 기는 강했다. 짙은 색안경 뒤로 형형하게 빛나는 눈빛은 삼십대 초반을 팔팔한 기자도 따라가기 힘들 정도였다.

이미 많은 군민들도 알고 있듯이 그의 집념어린 인생사가 음성과 눈빛에 그대로 묻어났다.

그가 한 약속은 5년전 현위헌관장학회 장학금 전달식에서 장학기금으로 50억원을 조성하겠다 했던 공언. 이제 그는 그 약속의 딱 두 배인 100억을 다시 목표로 잡았다.

▲“내가 뭘 했다고 기념관씩이나 지을라꼬”

처음 그의 고향인 이 곳 이동 초음마을에 기념관을 짓겠다는 생각은 그의 본래 의도는 아니었다. 그가 말했던 장학기금 50억 달성, 장학금 전달식 행사가 점점 커지는만큼 아무리 조촐하게 한다 해도 그냥 그 행사만이라도 민폐 끼치지 않고 할 공간이었음 했다.

그동안은 농협중앙회 남해군지부의 배려로 항상 2층 사무실 한 켠과 회의실을 이용했지만 이제는 재단 몸집이 커지다보니 이를 위한 조금 넓은 사무공간도 필요했고 전달식을 위한 공간도 필요했다. 그리고 1년에 한 번이지만 군내 어르신들을 위해 게이트볼 대회 진행준비를 위한 공간도 덩달아 있어야 했다. 그래서 고향 마을 한 켠 적당한 위치를 택했고 이왕 짓는 건물, 행사 때만 이용하고 텅 비워놓자니 그래서 평생 일본에 빼앗긴 문화재를 찾아 다니며 알게 모르게 쌓인 식견으로 모아둔 개인 소장 미술품이나 몇 점 건물 안에 전시해 놓고 오며 가며 누구나 쉬이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곳으로 만들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평생 고집스레 자신의 길을 걸어왔던 현위헌관 회장이지만 이번엔 조금 달리 생각해 봐야 겠다 생각했다. 그가 하고 있는 장학사업의 취지를 그리고 그 뜻을 잘 아는 지인들이 기왕에 짓는 거라면 “현위헌관 회장, 당신의 이야기를 담아 혹여 당신이 이 세상에 없더라도 그 뜻을 한번쯤은 다시 되새겨볼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은 어떻겠냐”는 제안이 한 두 차례 쌓이자 그도 자신의 처음 생각을 누그러뜨리고 ‘그러자고마’ 했다.

집념과 꺾이지 않는 의지의 현위헌관 선생이 어쩌면 처음 자신의 뜻을 굽힌 역사적인 결정(?)이 이 건물이 담긴 셈이다.

▲눈 감아도 떠오르는 그 이름, 오구라

현위헌관 선생과 함께 미리 돌아본 기념관은 말 그대로 그의 인생을 함축적으로 담아놓은 공간이었다.

선생의 발길은 ‘오구라’라는 일본의 권력자가 일제시대 우리 나라에 주둔하며 경부선 철도 부설시 상당한 양의 매장문화재와 우리의 국보급 문화재를 대구 어딘가에 묻어뒀다는 얘기를 대구경찰서 소속 안 순경으로부터 지리산 어느 기슭에서 듣고 막연히 우리 것을 찾아야 되겠다는 일념에서 일본으로 밀항했던 1949년 삼동 노루목 선착장에서 시작했다.

지리산 기슭 한 켠에서 이름을 처음 듣은 후로 눈을 감아도, 꿈에서 조차 잊혀지지 않는 이름 ‘오구라’. 노루목에서 출발한 밀항선을 타고 갑판을 기다시피 내린 곳은 야마구치현 나가노시 세응사기역 인근의 한 작은 어촌 마을. 그 마을에 내려 이제 ‘밀항자’, 요즘으로 말하면 ‘불법체류자’였던 그가 어찌 당시까지 서슬퍼런 일본의 권력자 오구라를 만날 수 있으랴.

밀항자, 청년 현위헌관은 그 때부터 재력으로 그를 만나리라 고물을 줍고 빠징고 지배인 등을 하며 밤낮을 잊은 채 ‘일벌레’가 됐다. 그렇게 힘든 생활을 하면서도 단 한 시도 ‘오구라’라는 이름을 잊어본 적이 없다는 그는 인터뷰 내내 자신의 뜻을 이어 장학회를 끌어가고 있는 아들의 이름보다 ‘오구라’라는 이름을 수 백배는 더 많이 불렀다.

▲어긋난 계획,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그렇게 십 여년이 넘게 죽을 고생을 하며 드디어 오구라의 행방을 찾아내고 긴 실랑이 끝에 침묵을 깨고 드디어 대구 방첩대 건물 아래 약탈 문화재를 묻어뒀다는 오구라의 한 마디를 듣는 순간 아득했던 지난 날이 필름처럼 지났다는 현위헌관 선생. 그리고 거기 묻혀있는 문화재는 ‘우리 것’이라고 말한 뒤 발굴키로 했던 바로 전날. 누군가에 의해 그가 그렇게 죽을 고생을 하며 찾으려 했던 그 유물들이 너무나 덧없이 발견됐다. 그리고 오구라가 소장하고 있던 우리 문화재 중 다시 반환받기로 했던 그 유물들은 1981년 일본 우에노국립박물관에 기증돼 버렸다. 이십년 넘게 아무에게도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대구방첩대 건물 아래 매장 문화재는 그렇게 찾아 헤매던 그에게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 의해 발견됐다. 오구라의 말과 실제 발굴됐다고 밝혀진 유물의 수도 달랐다. 매장 문화재의 발견과 달라진 유물의 수는 청년 현위헌관이 백발이 성성한 아흔을 바라보는 노인이 될 때까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이제 다시 고향으로… 꿈이 많은 아이들에게로…

그렇게 평생을 우리 문화재를 찾겠다 고생하며 살아왔던 일생. 그의 손에는 오구라의 며느리가 시아버지로 인해 평생을 고생한 그의 노고에 답례로 전해 준 오구라컬렉션 문화재 도록이었다. 딱 한 권. 그 뿐이었다. 이후로도 현위헌관 회장은 다시 우리 문화재 반환을 위해 일본 시민단체·학계·변호사들과 함께 반환운동을 펼쳤다. 그렇지만 아직도 우리의 많은 국보급 문화재가 일본에서 국보급 대우를 받으며 여전히 그 곳에 있다. 제 있어야 할 곳을 잃은 채…. 이제 현위헌관 선생은 ‘새로운 보물’을 위해 남은 생을 쓰기로 했다. 배우고 싶어도 가난 때문에 배우지 못한 아이들의 꿈, 그 꿈이 그가 평생 찾아 헤매던 문화재만큼이나 소중한 ‘문화재’ 였고 ‘국보급 보물’이었다. 그렇게 사재를 털어 현재의 현위헌관장학회를 세웠다. 1984년부터 작년까지 1천명에 딱 한 명이 모자란 999명의 ‘보물’들이 현위헌관장학회의 장학금을 받아 더 큰 꿈을 키웠다.

아마도 현위헌관은 전생에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지켜야 했던 숙명을 띤 수문장이었으리라 상상을 해보는 순간이다.

▲아직도 꿈을 꾸는 백발의 노인

그는 이 기념관에서 꼭 하고픈 일이 있다.

그저 한 번의 장학금으로 아이들의 꿈을 키워주는 일도 너무나 가치 있는 소중한 일이지만 이 곳에서 그는 중국에서 유능한 중국어 강사를 초빙해 군민들과 아이들을 대상으로 중국어를 가르키는 일을 할 예정이란다.

일본에서 평생을 살며 그 곳에서 사업으로도 성공을 거둔 이가 웬 중국어 타령인가 했다. 현위헌관 회장의 답변을 듣자 정확히 그의 나이에 삼분지 일 정도밖에 안 되는 손자뻘의 기자, 머리통을 한 대 쥐어박힌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일본은 이제 지는 해다. 내가 그 곳에서 사업을 해 봐서 잘 알지 않겠나. 중국 커지는 거 젊은 사람이니 더 잘 알잖소. 저기가 이제 돈을 벌 수 있어요. 꿈을 키울 수 있는 곳이고…”

그래서 이 곳 자신의 고향 마을 커가는 학생들이 그리고 젊은 사람들이, 나이를 불문하고 배움의 열정을 가진 이들에게 장학회 기금으로 무료 중국어 강좌를 열어줘 배우게 하고 싶단다. 거기다 중국에 직접 가지 않더라도 한국에 쏟아져 들어오는 중국관광객들이 남해를 찾으면 그들의 지갑을 꺼내게 할 고향의 중국어 능통자는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머리가 멍해지며 처음 기가 눌렸던 그의 음성과 눈빛보다 더 큰 아우라가 기념관을 가득 채운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 낼 모레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아직도 청년보다 더 큰 꿈을 꾸는 노인, 현위헌관 선생이다. 그의 이야기를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다음주 토요일 문을 여는 현위헌관기념관을 찾아보라.

한 인간의 불굴의 의지와 집념, 밑을 알 수 없는 고향에 대한 애정, 끝을 알 수 없는 도전의식에 새로운 의지가 가슴에 꿈틀거려 올라옴을 느낄 것이다.

저작권자 © 남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