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복이다, 업이다…” 생각하며 살아온 반백년

“내 생애 제일 행복한 순간”에도 엄마는 자식뿐이었다

세상 수많은 단어 중에 가장 눈물겨운 단어는 무엇일까. 난 첫 손에 주저없이 ‘엄마’라는 단어를 꼽는다. 아무리 세상이 험하고 모질다 해도 ‘엄마’를 생각하면 푸근하면서도 한편으로 아련하고 죄스럽고 한없이 애달프다.

창선 적량마을을 향하는 길, 붉디 붉은 고사리밭 황톳길과 한참을 고개마루를 차고 올라 등성이에 올라서면 내려다 뵈는 푸른 바다와 오롯이 자리한 마을 풍경은 언제 봐도 시원하고 아름답기만 하다. 볼 때마다 탁 트인 그 아름다운 경치에 마음을 뺏긴다.

적어도 이 ‘엄마’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상기인은 지극한 효성심을 지닌 자로서…’로 시작하는 ‘엄마’의 공적조서 한 장을 받아 들고 ‘엄마’를 만나러 갔다.

지난 4일, 그 ‘지극한 효성심’의 댓가로 보건복지부 장관이 주는 효행 표창을 받은 임영자(창선 적량) 씨를 표창 받기 하루 전날 미리 만나러 갔다.

이 ‘엄마’의 이야기는 창선 고두마을 열 아홉 처녀가 대방산을 휘휘 돌아 반대편 적량마을로 시집오던 날부터다. 이날도 엄마는 그대로였다. 열 아홉 처녀가 시집오던 날부터 시작해 낼 모레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돼 머리에 반백서리가 내려 앉을 때까지. 엄마는 반백년간 일년 삼백예순다섯 날을 이날 이 모습 그대로였다. 고사리를 데쳐내는 달큰한 내음이 담장 너머로 엄마보다 먼저 마중을 나온다. 내일 장관 표창을 받으러 가는 날인데도 엄마는 품 넓은 몸빼바지에 여전히 고사리 데쳐내는 큰 솥에 물을 붓고 아궁이에 장작을 밀어 넣느라 여념이 없었다.

#1.

처음 만난 ‘엄마’는 말이 없었다. 엄마가 처음 시집왔을 때부터 눈이 좋지 않던 시어머니는 낼모레 백수를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시어머니의 나이가 더해갈 때마다 안 좋던 눈은 점점 더 심해지더니 결국에는 보이지 않게 됐다. 그게 벌써 근 오십년 전 이야기다. ‘엄마’는 시어머니의 보이지 않는 눈을 대신해 눈이 돼야 했고 손발이 돼야 했다. 그게 벌써 반백년 엄마가 살아오며 눈만 뜨면 해야 했던 일이다.

눈이 보이지 않는데도 정갈하고 깔끔했던 시어머니는 몇해 전까진 더듬어서라도 층(마루)에 앉아 마른 걸레질을 해줬다 했다. 그랬던 시어머니도 이제는 세월의 힘에 부쳤는지 아이가 되고 말았다. 얼마 전에는 자다 깨어 보니 방에는 기척이 없고 뒤안에서 온 곳을 더듬고 있는 시어머니를 봐야했다. 반백년 시어머니의 눈이 되고 손발이 됐던 엄마는 세찬 바닷바람 맞으며 굴을 따다가도, 고사리밭을 매다가도 하루 열 두 번도 넘게 집으로 급한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엄마만의 시간은 그렇게 더 줄어 버렸다.

#2.

그 뒤로도 엄마는 계속 말이 없었다. 13년전 먼저 세상을 등지고 떠난 남편. 열 아홉 처녀가 섬 반대편으로 처음 정을 붙였던 남편은 사람들한테 후하고 ‘법 없이도 살 사람’이었다. 사람 좋던 남편 곁엔 늘 사람이 많았다. 사람이 많으니 늘상 술도 함께 였다. 반백년 눈이 보이지 않는 시어머니 모시고 육남매 길러가며 살던 힘든 엄마의 삶에 남편의 술은 천근만근의 무게를 더했다. 엄마는 남편의 술버릇을 ‘풍악’이라 했다.

“영감 술 한 잔 걸치면 우리 집에는 항상 ‘풍악’이 흘렀제. 유리창이 깨지고 밥상이 나뒹굴고….” 그 풍악이 울리면 위로 딸 넷, 아래로 아들 둘, 엄마는 풍악소리를 피해 자식들을 보듬었다. 그 ‘풍악’이 울릴 때마다 어린 마음에 생채기가 났을 딸네들을 생각하면 아들네들을 생각하면서 엄마는 연신 ‘아이고’란 말을 추임새처럼 달아냈다.

먼저 세상버린 남편 이야기 끝은 항상 ‘아이고’라는 말로 시작해 육남매를 향한 미안함과 고마움이었다. 그러던 엄마의 눈 끝이 벌게진다.

“진주서 큰 아들이 고등학교 댕길 땐 갑다. 한날 다니러 왔는데 그날도 풍악이 울었제. 아들이 책보 싸들고 그 밤중에 걸어 단항 도선 타는 데까지 걸어가는데…”

그리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엄마의 기억은 그날 밤 책가방을 들쳐 메고 울면서 밤길을 걸었을 큰 아들 뒤를 쫓고 있었다. 엄마 눈 끝의 홍조가 조금 더 붉어진다.

#3.

엄마는 말이 없었다. 큰 상을 받게 됐는데 소식을 듣고 기분이 어땠냐고 물어도 그냥 아무 느낌이 없더라고. 살면서 제일 힘들었을 때가 언제였냐고 물어도 그리 쓸 만한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 홍조를 보니 엄마가 왜 말이 없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거의 반백년을 엄마는 엄마의 시간을 시어머니의 손발을 대신하는데 썼기 때문이었고 남편을 대신해 부모의 양 몫을 다 보태 아들딸 육남매의 생채기를 보듬는데 썼기 때문이었고 그 생채기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착하게 자라준 자식에 대한 고마움 때문에 엄마는 더 말이 없었다.

더 이상 엄마에게 이것저것 묻는 것을 그냥 놔버렸다. 엄마의 반백년, 열 아홉 처녀가 반백의 서리를 머리에 안고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될 때까지 엄마는 그냥 그날 내가 봤던 그대로였을 터였기 때문에 끊임없이 던지는 질문에 엄마는 그리 많은 얘기를 할 수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엄마에게 좋았던 기억 한 두 가지는 있지 않을까.

엄마 일생에 가장 기뻤던 순간. 그 순간마저도 엄마 자신은 없었다.

“막내 아들까지 다 출가시키고 나니 그제야 할 도리 다 했다는 생각에 제일 기뻤제…. 우리 아들네들 딸네들 며느리들 사위들 다 야무지고 착하고…. 그냥 형제간에 항상 우애 있게 지내고 내외간에 좋게만 살면 그게 제일 기쁘제 뭐….”

엄마는 기자가 만난 뒷날 보건복지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 ‘장한어버이 표창’을.

엄마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엄마를 만나러 가던 길, 말했던 그 고갯마루에 차를 세우고 한참을 내려다 봤다. 붉디붉은 적갈색 고사리밭 황톳길에서 엄마 눈에서 제몰래 흘렀을 눈물 내음이 나는 듯했다. ‘그 오랜 세월 엄마의 눈물을 담아 저리도 붉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그 길에서 문득 엄마가 신고 있던 고무신이 떠올랐다. 엄마가 신고 있던 흰 고무신은 저 황토빛을 제몸에 옮겨 담아 누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었다. 엄마의 삶은 엄마의 신발에도 그렇게 붉은 황토빛의 눈물이 베이게 했다.

열 아홉 시집올 때 곱고 희었을 엄마의 손은 저 황토빛 고사리 밭에서 그리고 매서운 바다 삭풍에 주름이 지고 살이 텄다. 가파른 비탈에 어설피 단을 지어있는 고사리 밭은 엄마의 손을 닮았다.

시원하게 탁 트인 바다는 엄마가 연신 내뱉던 ‘아이고’ 추임새 끝에 담긴 긴 한숨이 녹아든 것만 같다. 아름답고 시원하기만 했던 코발트 블루빛의 바다색은 엄마의 긴 한숨과 바다처럼 깊은 자식 사랑을 닮은 듯 하다.

적량마을에서 ‘엄마’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그 고갯마루에서 내 엄마를 그리고 지금은 저 위에서 내려다보고 계실 내 아버지를 떠올렸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그리고 세상 모든 ‘엄마’에게 그리고 ‘아버지’에게 고맙다. 그리고 죄송하다. 그리고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둔 말을 세상 모든 ‘엄마’에게 전한다. “사랑합니다…”라고. 한동안 그 자리에 앉아 먹먹한 가슴을 눈물로 쓸어내리다 왔다. ‘엄마’를 만났던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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