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군내 지역신문과 인터넷 언론매체를 통해 김만중 선생의 대표적인 소설 『구운몽』의 창작지와 남해 유배지에 대한 문제가 학술 논쟁화 되고 있습니다. 이 두 문제는 오래 전부터 명확한 학술적 근거를 찾지 못해 구전이나 추론에 의해 해석되어 왔습니다. 학자들의 입장은 해석의 방법이나 논거에 따라 이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남해군에서는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구운몽』창작지와 김만중 유배지 논쟁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관심 있는 국문학자들과 향토사학자들이 더 깊은 연구를 통한 결론을 내려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1.『구운몽』창작지에 대한 남해군의 입장

1) 남해 창작설

  (1) 국문학계에서 최초로『구운몽』의 창작지를 밝힌 것은 1939년 경성제국대학 교수 천태산인 김태준의  『증보조선소설사』입니다. 김태준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서포에 관해 서술하면서 “그는 남해 배소에 있으면서 어머님이 병에 누운 소식을 듣고 하룻밤에 구운몽을 지어 어머님의 병을 위로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김태준 교수는 조선시대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이재의 『삼관기』,  심재의 『송천필담』, 김만중의 『선비정경부인행장』 등에 나오는 『구운몽』창작 관련 구절을 근거로 김만중이 남해로 유배 온 1689년,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지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구운몽』에 관한 최초의 창작지에 대한 논의의 시작이었습니다.

  (2) 1962년 김기동 동국대 교수 역시 『이조시대소설론』에서 『구운몽』은 남해의 고도에서 창작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김기동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구운몽』은 작자가 숙종 15년(1689)유배 중 남해 고도의 배소에서 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창작 동기는 배소에 있으면서 고향에서 우사(憂思)에 잠겨 있는 모부인(母夫人)의 파한(破閑)과 소수(銷愁)를 위하여 지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지극한 효성으로 보아 배소에서 노모의 질환을 듣고 위안시키기 위하여 지었다고 하는 말은 용이하게 수긍할 수 있으나, 일야지간에 지었다고 하는 세전(世傳)은 믿을 수 없다”고 서술하여 남해 창작설을 다시 확인하였습니다.

  (3) 1973년『한국소설연구』에서 이재수 경북대 교수 역시 1687년 5월 형 김만기가 죽고 9월 선천으로 유배된 시기는 불행한 시기이며, 다음해 사면되었다고 전제하였습니다. 그리고 남해로 유배될 때는 김만중의 당파인 서인이 축출 당하고 조카들도 모두 유배되었으며, 어머니까지 돌아가시는 비운과 절망의 시기라고 했습니다. 이재수 교수는 이때 김만중 선생이 사색과 저작으로 4년간을 보내면서 『서포만필』,『구운몽』 등을 창작하였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또한 이 때에 김만중 자신도 양소유와 같이 공명의 허무함을 느끼고 부처님께 귀의하고자 하는 심경이었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4) 1974년『서포소설연구』에서 경성대학교 김무조 교수는 남해의 지명 등을 보태에『구운몽』의 남해 창작설을 주장했습니다. 용문사에서 바라본 남해바다를 무대로 설정하고 싶었지만 너무 좁고 장엄하지 못해 중국의 남해를 차용하였다고 서술하였습니다. 또한 남해에서 『사씨남정기』를 먼저 창작한 후 『구운몽』을 지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5) 1976년 연세대학교 설성경 교수는 『구운몽의 구조적 연구(5) - 공간적 배경과 구전 소재』라는 논문에서 남해 금산의 불교적 소재, 주인공 성진과 관련된 성진골이라는 지명, 석교라는 지명과 그 마을의 돌다리에서의 팔선녀와 성진의 만남 등을 근거로 남해 창작설에 힘을 보탰습니다. 하지만 김병국 교수의 『서포연보』에 의한 선천설 주장 이후 남해 창작설을 철회하고 선천설을 주장하였습니다.

  (6) 최근 (사)남해역사연구회 부설 한국유배문학연구소 박성재 소장은 『서포연보』에 나오는 몽환이라는 주제의 글이 『구운몽』이라 단정할 수 없고, 김무조의 학설에 의해  『사씨남정기』이후에 『구운몽』을 창작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포연보』의 1692년 남해유배 마지막 해 기록인 다음 내용을 『구운몽』과 일치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3월에 육화공에게 답장하는 편지에는 ‘신상(身上)의 여러 증세들은 진실로 끝내 지탱해 낼 도리가 없고, 같은 시기에 쫓겨난 신하들은 모두 세상을 떠나 거의 없으니, 인생은 진실로 한바탕 꿈인가 합니다. 지난 가을 (형님과)걸상을 마주하고 앉았던 일이 더욱 마음속에 또렷이 빛남을 깨닫습니다.”인생은 진실로 한바탕 꿈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시기에 마지막 작품으로 『구운몽』을 창작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권필의 『석주집』, 손찬식의 「김만중의 유배시에 표현된 정서」등을 인용하여 남해설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2) 선천 창작설

  (1) 1955년 이가원 교수는 『구운몽평고』에서 남해 창작설을 주장했던 김태준 교수, 김기동 교수, 이재수 교수 등과 같이  조선시대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이재의 『삼관기』,  심재의 『송천필담』, 김만중의 『선비정경부인행장』등에 나오는 『구운몽』창작 관련 구절을 근거로 선천설을 주장하였습니다. 『삼관기』에 나오는 영해는 필사상의 오기에 의해 영남으로 나타나기도 하기 때문에 김태준 교수 등이 구운몽의 창작지를 영남지방에 있는 남해로 잘못 해석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영해라 함은 윤부인이 김만중을 전송하면서 “영해로 유배되는 일은 선현들로서도 면치 못한 것이니, 그곳에 가거든 자신을 소중히 하고 나를 염려하지 말라”는 부분에 대한 내용입니다.

  (2) 정병욱 교수는 1972년 『구운몽』에 유배기간을 착각하면서 이가원의 선천설을 수용하였습니다. 정병욱 교수는 『구운몽』의 저작연대는 선천 또는 남해 둘 중 하나가 확실하다는 전제를 달고 선천에서 14개월, 남해에서 10개월 미만의 유배생활을 했기 때문에 “이 작품을 구상하고  집필하는 데 과연 10개월 미만의 기간으로 완결할 수 있을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따라서 필자의 생각으로는 14개월간의 여유를 가졌던 선천 적소기가 구운몽의 저작연대로 가능한 시기가 아닌가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는 남해에서 3년 2개월의 유배생활을 했기 때문에 큰 의미가 없는 창작설인 것으로 판단됩니다. 차라리 남해설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3) 서울대 김병국 교수는 1988년 한국학보 51집에 「구운몽 저작시기 변증」이라는 논문에 일본 천리대에 소장되어 있는 『서포연보』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구운몽』의 선천 창작설이 확정되었다고 했습니다. 1736년에서 1776년 사이에 서포의 종손인 김양택이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서포연보』에 의하면 1687년 “부군이 배소에 도착하여 윤부인의 생신을 맞이하니 시에 가로되 󰡐멀리 어머님께서 자식생각에 흘리실 눈물 생각해 보니, 하나는 살아 이별, 하나는 죽어 이별이구나󰡑라 읊었다. 또 책을 지어 붙여 보냈는데 소일거리를 삼고자 함이었다. 그 뜻은 일체의 부귀영화가 몽환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런 뜻을 넓혀서 자신의 슬픔을 달래고자 한 까닭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김병국 교수는 그 글이 구운몽이 틀림없고, 「구월이십오일 적중작」을 쓴 이후 얼마 되지 않은 사이에 지은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3) 설성경 교수 역시 『서포연보』의 신빙성을 신뢰한다는 입장에서 기존의 남해 창작설을 김병국 교수의 선천 창작설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최근 남해신문에 <구운몽 저작지 남해 아니다>는 근거로 『선비정경부인행장』,『서포 김만중 행장』,『서포연보』,『삼관기』, 『송천필담』, 『오주연문장전산고』의 내용과 의미를 게재하였습니다.
또한 택민국학연구원에서 발행하는 『국학연구론총』제6집에「구운몽 남해 창작설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2010년 12월 31일 발표하였습니다.
3) 선천과 남해 동시 창작설

  (1) 정규복 고려대 명예교수는 1996년 1월 문화체육부 한국문화예술진흥원에서 발행한 「1월의 문화인물 김만중」에 “김만중의 대작 구운몽은 선천 귀양지에서 그의 모 부인을 위하여 쓰여지기 시작하여 남해 유배는 3년 이라는 비교적 여유가 있었으므로 이 시기에 완성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2) 임종욱 박사는 구운몽은 분량이 상당히 많은 장편이므로 선천유배 시기에 탈고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고, 양소유와 팔선녀의 애정관계가 구체적으로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는 글을 청춘에 홀로되어 정절로 세월을 보낸 어머니께 보낸 글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자극적이라는 의견을 피력 했습니다. 또 구운몽을 서포연보에 나타나는 몽환에 접목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으며 구운몽과 몽환은 별개로 구운몽은 선천 유배에서 시작하여 남해에서 완성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4) 남해군의 입장

  1939년 김태준 교수의 『구운몽』 남해 창작설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이가원, 김기동, 정병욱, 이재수, 김무조, 설성경 등 많은 학자들이 남해와 선천 두 지역을 주장해 왔습니다. 그것은 1730년에 발행된 『삼관기』에 나타나 있는 “패설에 구운몽이라는 것이 있는데 곧 서포가 지은 것이다. 큰 뜻은 공명과 부귀가 일장춘몽으로 돌아가 버린다는 것이니, 대부인의 근심 걱정을 위로하고 풀어드리기 위한 것이었다. 이 책이 부녀자들 사이에 성행하였는데, 내가 어렸을 적에 흔히 이 이야기를 들었는데, 대개 석가세존의 말에 의지하였으며 그 중에는 석가세존의 뜻이 많았다.” 라는 내용과 ,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세상에 전하기를 구운몽은 서포가 귀양 갔을 때 대부인의 근심을 풀어드리기 위해 하룻밤에 지었다 ”는 등의 서술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그 후 1988년 『서포연보』에 “부군이 이미 귀양지에 이르러 윤부인의 생신을 맞이했다. 시를 지어 말했다. 󰡐멀리 어머님께서 아들을 그리며 눈물 흘리실 것을 생각하니 , 하나는 죽어 이별, 하나는 생이별이구나󰡑라 읊었다. 또 글을 지어 부쳐서 윤부인의 소일거리를 삼고자했다. 그 뜻은 일체의 부귀영화가 모두 몽환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런 뜻을 넓혀서 자신의 슬픔을 달래고자 한 까닭이다”라는 내용이 발굴됨으로써 『구운몽』의 선천 창작설이 통설로 인정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룻밤에 지었다는 『구운몽』의 비현실성과  ‘몽환’이라는 주제로 쓴 글이 비록『구운몽』과 주제가 비슷하다 해서 확실한 『구운몽』이라고 볼 수 없다는 학자들의 의견과 함께 “인생은 진실로 한바탕 꿈”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남해유배 시기에 마지막 작품으로 『구운몽』을 창작했다는 설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구운몽의 남해 성진골 등의 지명과 성진과 팔선녀가 만난 석교가 용문사 인근에 있으며, 한문본에 용문산 용문동이라는 내용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용문사를 자주 들렀던 김만중과의 관계 등을 근거로 남해 창작설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선천설을 주장하는 설성경 남해유배문학관 명예관장과 (사)남해역사연구회를 비롯한 향토사학자들께서는 더 깊은 연구를 해 주시기를 부탁드리며, 남해군은 구운몽 창작지가 학술연구를 통해 남해나 선천으로 명확하게 밝혀지기 전까지는 창작지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은 유보합니다. 그리고 남해군은 여러 학자들이 『구운몽』 창작지에 관한 연구에 동참할 수 있도록 모든 여건을 제공하여 『구운몽』 창작지 논쟁을 갈무리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 김만중 유배지에 대한 남해군의 입장

  서포 김만중 선생의 유배지가 남해라는 것 뿐 구체적인 적소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밝혀진 내용이 없습니다. 지명이 드러난 자료는 거제로 유배된 조카 죽천 김진규가 숙부 김만중에게 보내려고 쓴 시「망운산가를 숙부에게 받들어 부침」 제목 밑의 세주에 “남해에 망운산이 있다. 인편이 없어 부치지 못하다”라고 하였으며, 시 내용에 “…… 하늘도 멀리 이별할 것을 불쌍히 여겨 유배거처로 망운산 변두리에 살게 하였네……”라는 내용이 있어 유배 거처를 망운산 변두리로 짐작케 합니다.


  또한 서울대 김병국 교수는 「남해적사고목죽림유감우심작시」에 등장하는 지명 ‘용문산’을 연결하여  서울대 김병국 교수는 망운산의 지맥이 서남쪽으로 구부러져 원산이 되고, 원산의 남쪽 골짜기가 깊고 그윽하며, 산수가 맑고 아름다운 곳에 용문사가 있다는 「남해읍지」의 내용으로 보아 김진규가 망운산 변두리라고 한 것은 곡포보가 있었던 화계나 용소 주변이었을 것이라는 학설을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사위 이이명이 김만중의 적소에서 매화나무 두 그루를 옮겨온 것도 마지막 유배지가 노도라고 볼 수 없다는 주장을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노도에는 ‘노자묵고할배’에 얽힌 구전설화가 전해오고 ‘노지나묏등(허묘)’ 등 서포 김만중 선생에 대한 구체적인 유․무형의 문화자산이 남아 있어 노도가 서포 선생의 유배지임을 입증하는 구체적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천극절도지명’을 받았지만 향교를 드나들며 『주어찬요』등을 저술했던 점, 용문산에 있는 고목을 보며 지은 시, 석교마을에 김만중이 자주 다녔다는 설화, 노도에 전해오는 설화, 노도에 김만중의 허묘가 있는 등을 종합해 보면 앵강만을 바라보며 동정호를 연상하고 많은 글을 지었으며, 어머니 돌아가신 후 조용히 외로운 섬에서 살고자 스스로 섬으로 들어갔을 것이라는 학설과 결정적으로는 노도에 서포 김만중의 선생의 허묘가 존재하는 것으로 볼 때 노도가 서포 선생의 적소로 추정됩니다.

 그러므로 노도를 중심으로 한 앵강만 일대가 바로 서포문학의 성지이며, 서포 선생의 문학정신이 깃든 곳으로 판단됩니다. 따라서 남해군은 ‘노도 문학의 섬 프로젝트’를 통해 노도를 중심으로 자연친화적인 문학의 섬으로 조성하는 한편, 용문사, 석교 등과 관련된 지역에 시비 및 조형물을 건립하는 등 서포 김만중 선생을 선양하는 사업을 함께 해 나가고자 합니다.

  노도 문학의 섬에는 병자호란에서 순국한 김만중 선생의 아버지 김익겸에서부터 전쟁의 혼란 중에 태어난 선생이 살아온 모든 흔적을 조명할 것입니다. 또한  『서포만필』의 한글예찬론은 물론 『구운몽』과 『사씨남정기』에 나타난 충절의 정신, 「사친시」 등 수많은 시편에 보이는 어머니를 향한 효심이 섬의 구석구석에 맴돌게 하고자 합니다.

  서포 김만중에 대하여 수 많은 학자들과 남해를 사랑하는 군민은 물론 향우들의 애정 어린 관심과 충고가 노도 문학의 섬을 남해의 또 하나의 명품으로 만들 수 있다고 봅니다. 남해군에서는 언제라도 여러분의 고견을 듣고 노도 문학의 섬을 가꾸어 나갈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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