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민사는 조선 중기에 지은 것으로 크고 아름다운 미조항이 한눈에 들어오는 왼쪽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최영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내가 들렀을 때는 마침 무민사로 드는 진입로 공사가 한창이어서 마을 가운데의 소로를 따라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한낮의 무민사는 듣던 대로 미조항을 내려다보며 고요한 시간을 안고 있었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 문은 굳게 잠겨있었다. 찢어진 문틈으로 명장의 영정을 훔치듯 들여다 보아야하는 맘이 편치 않다. 담 밑엔 낡은 문짝이 비스듬히 누워 시간을 거스르고 문밖에는 찢어진 종이들이 바람에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영정 앞 제단에 조촐했지만 제수가 놓여있는 것으로 보아 때가 되면 누군가 제를 올리고 가나보다 미루어 짐작만 할 뿐이었다. 해풍에 작은 대나무 이파리가 파도소리를 내는 무민사. 모든 후원이 그러하듯 사당 뒤뜰에는 정적이 고여 한낮에도 알 수 없는 음기가 느껴졌다. 사당을 두루 돌아보고 밖으로 나오자 햇살은 언제 그랬냐 싶게 눈앞에 펼쳐진 미조항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상록수림과 미조항
 
미조!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인가? 
우리네 조상들은 어느 곳이든 사람들이 살아온 마을은 풍수설에 의한 지형적인 문제점들을 보완하기 위해 적절한 때에 적당한 나무를 골라 심어왔다. 사람들은 은연중 오래된 나무들의 주술적인 힘을 믿어온 것도 사실이다. 더욱이 남해는 섬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어딜 가나  방풍림이 있다. 그리 많지만 않았지만 미조상록수림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남해 제일의 항구인 미조항은 남해섬 최남단에 있는 미조면의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해안선과 조도, 호도라는 두 개의 유인도와 16개의 작은 섬을 품고 있는 천혜의 조건을 가진 곳으로써 남해읍에서 19번 국도를 타고 가다 보면 종착점이 바로 미조항이다. 방심하고 초전에서 송정으로 바로 내달리면 미조항을 놓칠 수도 있으니 초행길은 반드시 이정표를 확인하고 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미조항은 미항일 뿐 아니라 앞 뒤 어디나 배를 접안 할 수 있는 자연 항구로써 새벽 일찍(5시∼6시) 나가면 수산업협동조합 위판장에서 좋은 구경거리인 활어경매를 볼 수 있다. 특히 도시의 후줄근한 삶에 찌든 여행자들에겐 적극 권하고 싶은 곳이 바로 미조항 위판장이기도 하다. 밤새 그물을 올려 만선으로 돌아온 배들이 잡아온 고기를 위판장에 부린 다음 경매로 사고 파는 풍경은 생존한다는 것이 얼마나 리얼한 경쟁을 필요로 하는지 한 눈에 간파할 수 있다. 배가 들어오는 순서대로 위판장 곳곳에 갓 잡아온 고기들이 쌓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사람들의 움직임은 부산해진다.
 내가 간 날은 많은 멸치가 위판장을 메우고 있었지만 은빛 갈치와 전어, 남해 사람들이 좋아하는 물메기도 상자마다 가득했다. 이른 새벽 위판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고함소리는 살아있는 생선만큼 힘있고 싱그럽다. 양이 많든 적든 미조 위판장에서 구매하는 생선은 싱싱하고 싸다. 그 새벽에 팔딱팔딱 뛰는 생선을 보고 있으면 살아있음이 청정바다처럼 푸르게 실감이 나기도 한다. 바다는 곧 생명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바다에 삶을 기대고 사는지 남해에 가면서도 미조항에 가보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귀한 삶의 끈을 놓치고 사는 사람이 분명하다. 경매는 신속하게 진행된다. 값을 흥정하는 사람들의 후끈하게 달아오른 새벽 위판장의 열기를 뒤로하고 올라서는 언덕까지 남해사람들의 굵은 목소리가 따라왔다. 바다처럼 싱그럽고 건강하다.   
그러나 한적한 시간에 미조항 뒤로 숨어있는 일주도로를 찾아가는 맛은 호젓한 여행을 선호하는 사람이라면 놓치지 말아야할 곳이 바로 그곳이다. 천천히 달리다 보면 차량 통행이 거의 없어 혹 길을 잘못 들었는가 싶기도 하겠지만 의심을 버리고 계속 가다보면 이름도 예쁜 팔랑마을과 검은 모래가 아름다운 설리라는 이름의 갯마을이 차례로 나타난다. 이 도로는 곧 송정해수욕장으로 이어지지만 급하게 달려 송정해수욕장으로 직행하는 것보다는 가는 길목에 차를 세우고 해안의 작은 풍경들을 놓치지 않은 여유와 지혜야말로 남해여행이 주는 작은 재미에 속한다.


/김인자(시인·여행가) http://www.isibada.pe.kr/kim8646@netian.com

■무민사
무민사는 최영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최영 장군은 고려의 유명한 충신인 최유청의 5대손으로 충숙왕 4년(1317)에 출생하였다. 1358년에 양광 전라도 왜구체복사가 되어 서해안과 남해안에 침입하는 왜구들을 격파하는데 큰 전과를 세운 명장이다. 1380년에는 해수도통사가 되어 삼남지방을 순찰, 왜구의 침입을 막기도 했다. 1388년  최영장군은 문화시중(지금의 총리)이 되어 자신과 고려왕조의 운명을 결정할 요동정벌을 계획하게 된다. 그는 비밀리에 왕과 의논하여 원나라를 도와 요동을 정벌하기도 했다. 최영 팔도도통사, 이성계 우군도통사, 조민수 좌군도통사. 이렇게 구성된 요동 정벌군 3만으로 원정을 떠났고 고려말의 혼란을 극복하고 새 왕조를 건설할 야심에 차 있던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역사적인 회군을 하여 왕을 폐위시켰다. 최영 장군도 결국 이성계의 손에 파란만장한 생을 마쳤다고 알려진다. 현재의 사당은 1954년 최영장군 유적보존회가 지은 것으로 내외 삼문을 갖춘 삼신각과 사당이 들어 있다.

■미조상록수림
상주를 돌아 송정해수욕장을 지나 아름다운 해안을 따라 가다보면 남해의 최남단 미조리가 나오고 이곳 마을 언덕에는 천연기념물 제29호인 상록수림이 있다. 상록수림은 524평의 면적에 60여년생의 낙엽수와 상록수 약 230여 그루가 있다고 한다. 해풍을 막아주는 방풍(防風)역할과 고기를 모으는 어부림(魚付林)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이곳 상록수림은 후박나무, 돈나무, 광나무, 볼레나무, 메밀잣나무 등인데 특히 마채나무, 참느릅나무, 졸참나무, 이팝나무, 쇠물푸레, 때죽굴피나무, 팥배나무 같은 순우리말 이름의 나무들이 숲을 더욱 숲답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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