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살 먹은 아들이 레슬링을 하자고 조른다. 애비를 이겨보고자 하는 속셈이 역력하다. 가당찮은 녀석의 당랑거철 같은 행동에 애비는 이 녀석을 어떻게 요리할 것인지를 고민한다. 그러다 이내 웃통을 벗어 제치고 녀석과 머리를 맞대고 으르렁거렸다. 한참을 힘겨루기를 하다가 드디어 애비는 4살 박이 아들에게 카운터 아웃을 당하고 말았다. 지난 번 레슬링시합에서 너무 쉽게 져준 탓에 아들에게 질책을 받았던 기억이 생생하였기 때문에 이번에는 애써 쉽게 져주지 않았다. 쉽게 져주던 날 아들은 그랬다. “에이 짱나. 무슨 어른이 이렇게 쉽게 질수가 있는 거야. 내가 모를 줄 알아? 아빠 바보야?” 그래서 이번엔 기를 쓰고 쉬이 져주지 않으려 애를 썼던 것이다. 탈진할 정도의 힘을 쏟은 아들이 그랬다. “역시 아빤 내 상대가 안 되는구먼 좀 더 힘을 키워봐! 다음엔 나를 이겨봐.” 최선을 다한 뒤에 보내는 아들의 흐뭇한 미소에 아빠는 한없는 애정 속에 빠져드는 기쁨을 누렸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통하여 권위와 친밀감을 생각해 본다. 만약에 아버지가 권위를 내세워 “이놈 애비가 너하고 레슬링 할 상대밖에 안 되는 사람이냐?”라고 아들을 무시했다고 가정하자 아들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라고 느꼈던 애비에게 엄청난 박탈감을 가지게 될 것이다. 또 형식적으로 져 준다는 느낌을 주었을 경우에도 승부를 걸어왔던 아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실망감을 안겨줄 것이고 아들은 두 번 다시 애비에게 승부를 요청하지 않게 될 것이다. 결국은 애비와 자식 간엔 관계의 단절이 일어나게 되고 그들의 애정전선엔 이상이 생기게 될 것이다.

 권위는 분명히 필요한 것이다. 인간의 자존감이며 존경의 대상이다. 그러나 상대에 따라서 권위를 고집하면 친밀감은 사라진다. 애비가 권위를 벗어 던지고 자식에게 다가감으로써 친밀감을 회복하듯이 권위와 친밀감은 상대적 개념으로 자리한다. 흔히 우리사회에서 감지되는 선량과 지역민의 관계에서도 한번쯤은 생각해 봐야할 문제다. 선량은 당선 전에는 지역민과 극도의 친밀감을 내세운다. 그러나 당선이 된 후에는 친밀감 보다는 권위를 자랑함으로써 지역민으로부터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

 지역민과 선량이 거리감을 가지게 되면 지역의 발전을 이루어 내는 데는 한계가 있다. 급변하는 현시대상황에 대처하여 발 빠른 행보를 하기위해선 선량과 지역민은 한 몸이 되어야 한다. 권위와 친밀감의 적절한 조화가 일어나야만 가능한 일이다. 필자가 가끔씩 만나는 지인 중에 40대의 우리 군내 기관장이 있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기관장을 맡고 있으니 상당한 권위를 자랑할 만한 사람이다. 그는 일과가 끝나면 직원들과 당구를 친다. 때론 남해군의 축제현장에 직원들을 대동하고 야시장 국밥을 먹기도 한다. 그보다 나이 많은 지역민을 만날 땐 항상 깍듯이 정중함을 다한다. 그럴 때 그에게서는 권위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오로지 친밀감만 존재한다. 그러나 업무 중인 그를 방문하면 추상같은 권위에 40대의 나이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그런 그를 보면 저절로 존경하게 된다. 권위와 친밀감의 조화가 사람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임을 그로부터 배운다.

 늘 지혜로운 삶을 생각하지만 실천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권력을 가진 자는 더욱 권위에 집착하려 한다. 인간의 본능적 습성인 까닭이다. 공적지위를 가진 사람은 더욱더 깊은 자기 성찰과 자제력으로 본능적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권력으로부터의 권위가 아니라 친밀감과의 조화로움으로부터 스스로 생성되는 권위가 우리 사회를 하나 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임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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