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집착, 기쁨·웃음 사라지게 해  
자기로부터의 탈출, 올바른 관계 첫발

  
 
  
고현감리교회 김순현목사. 
  

본지 이번 호부터 한달에 한번씩 고현 감리교회 김순현목사의 명상 수필을 싣습니다. 지난 2001년부터 남해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고 본지 논설위원이기도 한 김목사는 평소 작고 버림받은 것의 소중함을 중시하고 소유보다는 나눔의 삶이 가치있음을 지향하고 추구해온 젊은 목회자입니다. 김목사는 그간 2권의 번역서를 내놓기도한 전문 번역가이기도 합니다.  <편집자 주>


"집이 비좁지 않냐구요?"

번역서를 몇권 내다 보니 독자가 생깁니다. 때로 그분들이 직접 남해를 찾아오시죠. 그 때 저는 종종 그 분들과 남해를 한 바퀴 돌아보는데 바로 가천마을을 자주 찾습니다. 얼마전에도 남해를 찾은 한 여성독자와 가천마을 가파른 고샅길 나무아래에서 잠시 대화를 나눴는데 그분이 느닷없이 저희 집 얘기를 꺼내는 겁니다. 몇 평 안돼 보이던데 불편하지 않냐는 것이지요. 

실제 저는 우리 교회당 옆 열다섯 평쯤 되는 사택에 삽니다. 하지만 저희 네 식구 살기에 전혀 불편하지 않아요. 오히려 조금 세월이 지나면 더 줄일 생각입니다. 아내의 동의도 받았습니다.  지금 집은 예전의 절반 정도 밖에 안 되지요. 그래도 넓다는 생각이 들어요. 물건의 차지가 되는 것을 막을 줄만 안다면, 집이 더 작은들 어떠랴 싶어요. 바쇼의 하이쿠(고대 일본의 아주 짧은 시-편집자주) 가운데 이런 시(詩)가 있습니다.

사방이라야 /다섯 자도 되지 않는 /풀로 엮은 암자 /엮을 것도 없었네 /비만 없었더라면

어느 수도자의 암자를 보고 지었다는 이 시는 소량의 미학을 기막히게 표현합니다. 다섯 자를 요즘의 도량형으로 환산하면 대략 1.5미터, 아마 이 수도자의 키가 그 정도였을 것인데 자기 키 넓이의 암자에서 일생을 살다 간 수도자의 정신이 제게는 아주 높게만 보입니다. 그는 이 에프 슈마허(독일의 유명한 경제학자-편집자주)가 말한 대로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진리를 몸으로 살다 간 사람이었죠. 그런 소량의 미학을 구현해가는 것이 제 지향이기도 합니다.

집안 대청소를 하고 보니
 
 얼마 전 아내와 함께 봄맞이 집안 대청소를 했습니다. 옷장을 정리하는데 안 입는 옷들, 몸에 안 맞는 옷들이 줄줄이 눈에 띄는 거예요. 그런 것들이 있었으니, 자연히 공간은 점점 좁아지고, 운신의 폭도 좁아질 밖에요. 그래서 그 옷가지들을 싸고 또 쌌습니다. 아이들에도 말했어요. 불필요한 물건들, 헌 인형들 다 챙기라구요. 그렇게 보따리가 여러 개 만들어졌고 마을의 한 헌옷 수거함에 넣었습니다. 누군가 필요한 사람이 있을 테니까요. 아이들 인형은 깨끗하게 빨아서, 저희 교회 도서관을 찾은 아이들에게 나누어주었어요. 그러면서 저희 부부는 해방감을 맛보았어요. 집안 대청소를 마치니 집이 아주 넓어 보였어요.

누워서 아내와 이야기를 나눴지요. '앞으로는 물건들을 사지 말자, 젊었을 때부터 버리는 법을 익히자, 차츰 삶의 규모를 줄이자, 죽을 때에는 가벼이 훌훌 털고 갈 수 있게 하자.’말이 통할 때 찾아오는 행복감을 서로가 느낄 수 있었지요.

집이 물건창고가 돼서야

집은 물건창고가 아니라 영혼을 위한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영혼이 살려면 공간이 필요하거든요. 아니, 영혼 자체가 공간이 되어야 해요. 바람, 들꽃, 나무, 산새, 하느님이 나드는 공간 말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성경의 예언자 호세아가 말한 빈들일지도 몰라요.‘그러므로 이제 내가 그를 꾀어서, 빈들로 데리고 가겠다. 거기에서 내가 그를 다정한 말로 달래 주겠다(호세아 2장 14절).’

하느님과 밀어(密語)를 나누는 빈들, 그곳이 바로 영혼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영혼이 사물 내지 탐욕의 차지가 되어버리면, 운신의 폭은 좁아질 수밖에 없어요. 운신할 때마다 장애를 만나게 되는 거죠. 제가 존경하는 독일의 신비주의 영성가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실 여러분을 거스르는 것은 사물이나 방법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거스르는 것은 사물 속에 있는 여러분 자신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사물과 잘못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먼저 자기에게서 시작하고 자기를 여의십시오. 먼저 자기에게서 달아나지 않으면, 여러분이 어디로 달아나든, 방해와 불화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우리    

'사물 속에 있는 여러분 자신'이라는 표현은 우리가 사물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사물을 소유하여 자기만의 공간에 들여앉히고 거기에 매여 있는 우리의 마음을 암시하지요. 소유하고 사재기하여 쌓아두려는 태도는 사람과 사물을 자기 것으로 삼고 부리려는 태도입니다. 그것은 억압 및 통제와 닿아 있고, '나'와 '남'을 가르는 이분법적 태도와도 닿아 있어요. 엑카르트는 그것을 우리의 걸림돌이라 합니다. 이를 버릴 때에만 사물은 장애물이 아닌 벗이 되어 따스한 에너지를 발산할 것입니다. 사물과 잘못된 관계를 맺을 때, 우리는 도처에서 헤살꾼을 만나게 마련이에요.

사물과의 바른 관계에 들어서는 첫 단추는 언제나 자기를 여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이 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 찾아오는 부자유에 대해 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어디 우산 놓고 오듯/ 어디 나를 놓고 오지도 못하고/ 이 고생이구나/ 나를 떠나면/ 두루 하늘이고/ 사랑이고/ 자유인 것을
-정현종, ‘어디 우산 놓고 오듯’ 전문.

절창입니다. 저는 이 시를 읊조릴 때마다 무릎을 칩니다. '어디 우산 놓고 오듯' '나를 놓고 오'면 얼마나 좋겠어요. 소유하고 사재기하는 태도, 사물과 사람을 제 것으로 삼고 부리려는 태도, 나와 남을 가르려는 태도를 내려놓기만 한다면, '두루 하늘'일 테니까요.”

삶에서 웃음이 사라지는 까닭은

삶에서 웃음이 없어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무엇이든 자기 것으로 삼고 부리려는 태도야말로 우리를 내리누르는 짐이니까요. 그러니 기쁨과 웃음이 있을 턱이 없지요. 제가 좋아하는 신학자 매튜 폭스는 웃음에 대해 '실로 심오한 버림의 표현이다'라고 했죠. 우리를 얽어매는 내적인 짐을 내려놓는 것, 그것이 바로 웃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는 이런 정의도 내렸지요. '웃음은 신성한 우주의 음악이다.’가슴에 절절이 와 닿습니다. 버림은 웃음을 낳고, 웃음은 신성한 우주의 교향악에 한몫하고… 우리가 자기를 내려놓고, 신적인 우주 한가운데서 우주의 가족인 피조물 형제자매와 어우러져 웃음의 교향곡을 연주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울녘을 에워싼 모든 것이 방금 도착한 하느님의 선물로 여겨집니다. 그 길은 감사와 찬미, 진정한 경외로 나아가는 길이지요. 맑은 눈으로 보면 울녘의 모든 것이 은총 아닌 것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은총이나 아름다움은 '내'것도 아니고, '네'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가를 수도, 사재기할 수도 없으며, 편을 갈라서 쓸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로 흘러들고, 우리 모두에게서 흘러나가야 할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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