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는 바다만 있는 게 아니다. 1024번, 3번, 7번, 19번 등의 도로를 벗어나 4번, 5번, 6번, 11번, 12번 도로를 들어서면 바다와는 상관없이 농업에 종사하는 순박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데 길을 가다가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들을 만나면 조용히 차를 멈추고 쉬어 갈만한 곳은 도처에 있다.

현촌, 당항, 봉화, 비란, 무지개마을

이정표를 따라 발길 닿는 대로 창선 당항, 삼동 봉화, 서면 대정마을로 들어가다 보니 당항마을 입구에 할아버지 두 분이 나와 계셨다.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논밭으로 일하러가고 간간이 개 짖는 소리가 들렸지만 마을을 지키는 사람이라곤 노인밖에 없는 듯했다. 나는 두 노인 곁에 철퍼덕 앉아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간섭 없이 듣고 있었다. 두런두런 나누는 그들의 대화 속에는 현실정치도 있고 올해 거둔 벼 수매 값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흉흉해진 예전 같지 않은 인심에 대해 개탄하는 눈치였다. 육지와 연결되는 연륙교가 생기자 많은 외지인들이 몰려드는 것을 처음엔 그렇게 좋아하던 주민들도 여행객이 두고 간 쓰레기와 자동차 소음에 치어 벌써 후회한다거나, 여기서 온천이 개발되고 골프장이 생기면 민심이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 아무개는 논밭을 팔아 자식을 대학까지 시켰는데 일자 무식의 자식보다 그 놈이 더 불효한다거나, 이젠 먹고 살만한 아무개 집에서는 큰제사를 지내도 동네 사람들 불러다 잔치하는 풍습도 사라졌다는 등, 두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내륙마을이라 태풍피해는 그만했지만 젊은 사람들은 도시로 떠나고 힘없는 아녀자와 노인들만 남아 농사를 짓자니 문제가 여간 아니라고 했다. 농사걱정을 하던 할아버지 그도 쉰살이 넘은 며느리가 농기계를 직접 운전하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형편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서 할아버지는 어디 그 일이 어제오늘의 문제였던가 라고 스스로 자탄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홍시 하나의 사랑

어느덧 두 분의 이야기가 끊어질 무렵 할아버지는 그때서야 객이 있다는 걸 의식하셨는지 간식으로 들참이었던 연시 하나를 불쑥 내밀며 물으신다. “니, 어데서 왔노? 묵어봐라 감이다. 이건 약도 안친 긴데 맛 괜찮을 끼라” 그리고 나서 할아버지는 두런두런 당신의 이야기 속으로 되돌아갔다. 손에 받아든 연시 하나를 다 먹을 때쯤 어디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트랙터 한 대가 집 앞에서 멈췄다.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던 며느님인가 보다. 그녀는 검게 탄 얼굴에 왜소한 체격을 가진 우리나라 시골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보통의 촌부였다. 시시콜콜한 집안사정까지 물어볼 수야 없지만 그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될 사정은 분명 있을 것이다.
봉화나 내산은 제법 깊은 내륙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지만 당항은 바다에서 그리 멀리 않은 곳으로 뒤에 산이 포근하게 둘러쳐져 있는 꽤 큰 마을에 속한다. 마을 한바퀴를 천천히 돌아보았지만 할아버지 두 분 외엔 밭에서 일하는 사람 몇뿐이다. 큰 농사일은 혼자 하는 법이 없다 하시던 어르신의 말씀이 떠올랐다. 마을사람들은 아직은 서로 품앗이로 함께 씨를 뿌리고 추수한다고 했는데 그러나 아무리 기계영농을 한다해도 농경사회란 그 단위가 크든 작든 협동하며 살수밖에 없는 구조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남해는 섬 특유의 지형적인 영향으로 내륙 쪽이든 바다 쪽이든 돌이 흔하다. 특히 밭을 일굴 때 밭가의 석축을 보면 틈이 없고 아주 정교한데 그곳 당항마을도 예외가 아니었다. 두 어른께 인사를 드리고 자리를 일어서는데 바로 눈앞에서 ‘툭’하고 감 하나가 떨어진다. 누가 뭐래도 우리나라 농촌의 가을 풍경은 역시 빨갛게 익어 가는 감나무의 붉은 감과 지붕 위에서 두둥실 몸을 부풀린 달덩이 같은 누런 호박과 빨갛게 물들어 가는 토담의 담쟁이 넝쿨을 보면 알 수 있다.             
벼 수확이 끝나고 마늘파종을 기다리는 논밭은 비어있기 마련인데 해안을 달리다가 붉은 황토밭을 보면 아랫도리를 걷어올리고 들어가 맨발로 마냥 걷고 싶은 유혹을 떨칠 수 없다. 해풍으로 반죽된 황토밭은 살아 숨쉬는 미생물들의 왕성한 활동 때문인지 부드럽고 따뜻하다. 흙을 만지면 금방 손톱에 붉은 물이 들고 한 발 한 발 옮길 때마다 발바닥을 부드럽게 밀어 올려주는 황토, 살갗에 황토가 닿는 느낌은 우리 땅의 정서를 그대로 느끼게 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나는 남해에 머무는 동안 틈만 나면 머물던 숙소 주변의 붉은 황토밭을 맨발로 걷곤 하였다. 특히 봄날 잘 갈아놓은 황토밭을 걷는 느낌은 질 좋은 햇살과 어울려 그 맛이 특별하다. 흙이 좋은 이유는 기계문명에 정체되어있던 오관(간장, 심장, 비장, 폐장, 신장)을 두루 순환시켜준다는 것이다. 뒤에는 산이 있고 앞에는 바다가 있는 천혜의 여건을 가진 남해 황토밭에서 한나절 맨발로 뒹굴다 보면 비로소 내 존재도 대지의 일부임을 순순히 받아들이게 되는데 이것 또한 남해로부터 지속적으로 받게 되는 귀한 선물이 아닐 수 없다.   


/ 김 인 자(시인·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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