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두 사람의 이름은 우리 지역에서 요즈음 가장 많이 입에 오르내리는 이름일 것이다.
두 말할 나위도 없이 한 사람은 남해에서 배출한 최초의 선출직 경상남도지사이고, 또 한 사람은 지역민의 생활에 가장 밀접한 남해 군정을 맡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미 여러 사람들이 이 두 사람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조언, 충고를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 지면에서는 굳이 그런 부류의 이야기를 또 중언부언 늘어놓을 생각이 없다.  
다만 아주 작은 에피소드를 소개하고자 한다. 원래 사람의 진면목은 소소한 일에서 잘 나타나기 마련이다.

 2004년 쯤 이었을까?
김 두관 지사가 노무현 정부의 초대 행자부 장관을 하고 있을 때인가 아니면 막 중도에 하차하고 쉬고 있을 때 인가 했을 것이다. J시에서 J시 시장하고 김 장관하고 필자하고 셋이서 오붓하게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다. 가볍게 반주를 곁들이는 자리였는데 자그만 일식 식당이었다. 아마도 시장의 단골집이었는지 주인이 자리에 나와서 식탁위의 요리들을 이것저것 챙겨 주었다.
 하긴 그 지역의 시장과 행자부 장관이 와서 식사를 하니 주인으로서는 예의상 그러 했을 것이다. 전채 요리로 샐러드가 나왔다. 그런데 그 시장이 야채샐러드를 아주 좋아하는지 유달리 큰 대접에 가득히 담겨있었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꽤나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식당 주인이 무엇인가 말을 할까 말까하고 주저 하는 것 같았다. 즉 말을 할 틈새를 보는 것 같았다는 것인데, 그런 자리에서 식당 주인이 끼어드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내가 먼저 물었다.
“ 사장님, 무슨 하실 말씀이 있으세요?”
“ 네, 저어, 장관님, 드레싱이 마음에 드시지 않는지요? 그럼 다른 것으로 가져올까요?”
그 말을 듣고 앞자리의 김 장관을 보니 드레싱을 하지 않은 맨 야채를 우걱우걱 열심히 먹고 있는 것이다. 나름대로 맛있는 드레싱을 준비한 주인으로서는 김 장관이 드레싱을 마다하는 것이 식성이 그러한지, 아니면 맛이 도통 없어서 그러한지 걱정도 되고 궁금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 다음 장면이 정말 재미있다. 막상 김 장관은 주인의 말을 이해 못했던 것이다.
“ 네? 무엇이라고요?”
“ 아, 드레싱이 마음에 안 드시냐고 여쭈어 보았는데요.”
“ 드레싱, 드레싱이 무엇인데요?” 
주인은 그 순간 할 말을 잃고 당황하는 모양이라서 내가 거들었다.
“ 야채 위에 얹어 먹는 소스를 말해요.”
“ 아, 그래요? 그럼 많이 얹어 주세요. 그렇잖아도 어쩐지 싱거웠어요.”     
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맛있게 야채샐러드를 접시를 깨끗이 비웠다. 아마도 그 식당에서는 두고두고 이야기 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김 두관은 그런 소박한 사람이다. 자기가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아무 가식 없이 물어 본다. 도정에 임하면서도 틀림없이 자신이 모르는 영역이 있으면 전문가의 자문도 받을 것이고 중지를 모아 일을 처리해 나갈 것이다. 앞으로 지켜보는 재미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정 현태는 다소 다른 성정을 지닌 사람이다.
생김은 어쩐지 산적 두목 같이 생겨서 지적일 것 같지도 않고 감성적으로 무뎌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데 한 번 들어 보라.
 재작년에 상지대 정대화 교수 일행들이 무리지어 필자가 근무하는 설천에 왔다.
그들은 전국 각지에서 학계나, 시민사회단체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라 대부분 정군수와 평소에 친하게 지냈거나, 알 만한 사람들이기에 저녁자리에 초청을 했다.
 타지 사람들과 자리를 하면 정 군수는 꼭 ‘흑진주’를 조제해 내 놓는다. 흑마늘 엑기스에 소주와 맥주를 적당이 혼합한 술인데 이를 흑진주라고 부른다. 지역 군수로서 지역의 특산물인 마늘 선전을 하는 셈인 모양이다.
 그 자리의 손님들은 다들 자기 영역이나 지역에서 내로라하는 호걸들이라서 주량도 만만치 않았다. 술이 거나해 지자 누군가가 제안해서 돌아가면서 가락을 한 자리씩 하게 되었다.
졸지에 식당이 ‘니나노’ 판이 된 셈인데, 마침 다른 손님들도 없었고 주인장도 풍류를 즐기는 편이라서 한 판 거나하게 놀았다는 것이다. 정 군수 차례가 되자,   
“저는 노래 대신 시를 한 수 읊겠습니다. 좀 다소 사연도 있고 슬프기도 한 시입니다.”
그 사연은 요약하면 이렇다. 평생소원이 학교 선생이었기에 사범대를 갔는데 대학 때 민주화 운동으로 인해 끝끝내 교사로 발령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노무현 정부 때 청와대에 근무를 하게 되었는데 경기도의 자기 집에서 청와대까지 너무 먼 거리라 전철을 타고 다니는 긴 시간에 시를 외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왜냐면 언젠가는 학교로 가서 교단에 설 것인데 그 때 국어 교사로서의 마음가짐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시 암송이 제일 이란다. 그렇게 해서 외운 시가 수백 수인데, 그 중의 하나를 읊어 보겠다는 것이다.
 그의 시 낭송은 일품이라서 보통 가수들의 노래 가락 멀리가라 할 정도의 실력이다.
그런데 필자는 앙코르를 받고 해서 그가 낭송한 시 두 편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왜냐면 ‘멀리서 스스로 찾아 준 벗(有朋自遠方來))’들에 취하고 흑진주에 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히 가슴 아프게 기억하는 것이 있다. 그의 눈물을, 슬픈 시를 읊으면서 참고는 있으나 눈가에 번져가는 이슬을 보았던 것이다. 이제 다시는 찾아 갈 수 없는 교직에 대한 회한이다. 그에게 있어서 교사의 길은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Lee Frost)의 ‘가지 않은 길’이다. 아니‘가지 못한 길’이다. 그는 항상 학교 이야기가 나오면 슬픈 표정을 짓곤 했기에 필자는 짐작했다.
어쩌면 당사자들에겐 거북한 에피소드일지 몰라도 이렇게 소개한 것은 이런 작은 흠결을 통해서 오히려 감동과 희망을 보기 때문이다. 소박하고 아름다운 정서는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소중한 바탕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들이 앞으로 보여야 할 것은 작은 자리에서의 작은 감동이 아니라 도정, 군정을 통해 큰 감동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멀리서 가까이서 재미있게 지켜 볼 요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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