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가는 게 억울한께....” 이 말을 하고 웃는 그는 아직도 해녀(海女)였다. 지금도 능히 저 푸른 바다속을 헤엄쳐, “후여, 후여” 가쁜 쉼을 내 쉴 수 있고 물질을 할 수 있는, 이 웃음 환한 여성.

강명애 씨(58.남해읍)는 “애구, 누가 젊어 보인다고 캅니껴. 누가 그리 말합니껴.”
제주도말과 경상도어가 반쯤 섞인 그다.

지난해 4월부터 남해시장에서 근무하는 그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눈이 멀어 남해로 와, 그게 38년이나 됐다”고 했다.

강명애 씨는 남해시장 도우미다. 소비자가 남해시장에서 물건을 구입했지만 옮기기 힘들 때, 어디서나 나타나 작은 손수레에 물건을 싣고 차타기 가까운 곳으로 옮겨주는 슈퍼우먼 같은 역할을 한다.

서너번, 만날 때마다 그리 인상이 좋더만, 인터뷰 좀 하자는 말에 딱 걸렸다. 물론 극구 사양했고 박박 우겨 만날 수 있었다.

80만원 봉급자인 도우미 생활, 고향 제주도와 남해에서 해녀 일을 할 때에 비해 한참 벌이가 떨어지지만 그는 일을 사랑했고 행복해 했다.
“사람 사는 맛을 이 일을 하며 느꼈고, 왔던 우울증도 일을 하면서 달아나 버렸다”는 그의 말, 새겨볼 만 했다.

“새삼 이 일을 하며 남해사람의 인정을 맛보고 있다”는 그는 “그래선 안되지만 물건을 옮겨드리면 보리쌀이나 쌀을 한 바가지 씩 주고 반찬 하라며 나물도 주고 죽도 사주어 먹기도 하고....엄마 같은 분들과 수다도 떨고 얼마나 좋은데.....”

“글쎄, 나이든 분들이 물건을 옮겨줬다고, 죽집에다 돈을 주고 가버리는 분도 계셔요. 얻어먹으면 안 되는데.....이런 게 사람 사는 정 같은 건지. 거절하기도 힘들고....인심이 후한 남해는 그래서 제2의 고향이지 뭐에요” 등의 말은 사람냄새 진한 서민들의 감동적인 삶 그 자체였다.

“주말마다 자녀들이 찾아오고 친구집에 놀러가고 친구가 놀러오기도 하고”라고 말하는 그의 웃음엔 그의 18번(애창곡)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제주도 사람이라서 그런지 ‘감수광’이 젤로 좋다”고 했고 다음으로 “기르기 아빠”라고 했다. “산에는 진달래 들엔 개나리.....” 노래를 부르는 그는 58세 꽃띠 로맨티스트였다.
“시집보내고 손자 가버리고 하니 우울증이 오더라고, 그러다 이 일을 시작했는데 우울증이 가셨어요. 운동도 되고 일을 하니 활기가 있으니까 자식들이나 사위가 ‘보기 좋으시다’고 말하면 또 그게 기분 좋고......어쨌든 이렇게 웃고 사니까 좋지 않나요.”

강명애 씨. 38년을 남해에 살았고 제주에서 27년을 해녀 생활을 했다. “남해 홍현에도 아직 해녀가 있고 같이 일을 하기도 했다”고 했다.

“남해는 바다 수심이 얕고 탁하고 제주도는 맑고 깊지만 해녀일은 수압을 덜 받아 남해가 더 쉽다”고 했다. 남해에서도 해녀일을 했다는 그다.

“해녀일을 그만둔지는 12~3년 쯤 된다”고 했고 “수압 적응 때문에 얼굴이 붓고 두통이나 멀미도 생기지만 우선은 살이 찌고 몸이 둔해 고생을 조금만 하면 일주일이면 다시 해녀 일을 할 수있다”고 했다.

“남해에서 아이들 키울려고 한푼이라도 더 벌려고 물질을 했어요” 힘든 과거를 말하면서도 강명애 씨는 웃었다. “해녀 일을 하면 돈은 더 많이 벌지만 후한 인심이랑 사람도 보고 하는 재미가 쏠쏠하다”며 또 웃는 그다. 소녀같은 순함이 있어 ‘저리 웃나’ 싶은 게, 남해시장에서 간만에 데이트한 느낌!? 남해시장 해녀 도우미 강명애 씨와의 인터뷰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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