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광 석 본지 편 집 인                  
  


'친일진상규명법'의 온전한 명칭은 '일제강점기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다.

이 법은 16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가 될 뻔했던 3월2일 본회의에 출석한 163명 의원 중에 151명이 찬성해(반대 2명, 기권 10명) 통과됐다.

이 법이 통과된 것은 형식면에서는 원내 다수당인 한나라당이 태도를 바꾸었기 때문이다. 당일오전까지도 반대당론을 굽히지 않던 한나라당이 이날 오후 열린 의원총회에서 의원 각자의 판단에 맡기는 자유투표로 표결에 임하도록 결정하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이렇게 될 일이었으면 한나라당이 그동안 이 법안에 반대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한나라당은 무엇 때문에 갑자기 태도를 바꿀 수밖에 없었을까? 필자는 '총선'때문이라고 본다. 선거일이 40여일 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한나라당 때문에'라는 여론의 공격을 받게 되면 선거에 도움될 것이 없다는 판단에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한나라당이 태도를 바꾼 진짜 이유는 "'친일진상규명법'이 통과되어도 실제로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법이 통과되기 전에 이 법의 제정을 주도해온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렇게 만신창이가 된 법안은 차라리 만들어지지 않는 게 낫다. 17대 국회로 넘기자"는 성명서를 발표했고 언론이 이를 크게 조명했다. 이 과정에서 한나라당은 당초 국회에 제출되었던 법안초안이 법사위 심의를 거치면서 알맹이는 빼내고 쭉정이만 남게 한 법안으로 뜯어고쳐졌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렇다면 선거에서 공격당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고 판단했다는 해석이다.
결과는 한나라당이 바라는 대로 한나라당은 '친일진상규명법'을 통과시킨 당으로 언론의 대접을 받으며 여론의 화살을 피해가고 있다. 이런 경우를 두고 딱 알맞게 표현할 말이 없을까?

언론은 '친일진상규명법'이 제정됨으로써 제헌국회 당시의 반민특위가 친일파들의 방해로 중도에 좌절된 지 55년 만에 다시 친일반민족 행위자를 청산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고 쓰고 있다. 과연 그런가? 아니다.

친일반민족행위에 앞장섰던 자들을 정부의 공인기록으로 남겨 '역사적 단죄'를 할 수 있는 길이 열렸을 뿐이다. 친일반민족행위에 앞장섰던 자들을 처벌하거나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거나 그들의 후손들이 부끄러움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하는 법이 아니다. 단지 정부의 공인기록으로 남겨 다시는 치욕스런 민족이 되지 말자는 것이다.

그러나 기록으로 남기는 일조차 지역적 차원에서는 해당되지 않는다. 법사위가 이 법안을 두 차례 크게 수정하는 과정에서 '전국적인 차원에서'라는 말을 집어넣어 상당수 친일 반민족행위자에게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친일반민족 행위 조사대상자 가운데 초안에 '일본군을 위안할 목적으로 부녀자를 강제동원한 것'이라고 된 것을 '전국적 차원에서 주도적으로 부녀자를 강제동원 한…'으로 바꾸었다. 사필귀정이라고 했는데 일이 이렇게 돼서는 안 된다고 본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즉 민족의 아픔을 외면한 채 자기안위만을 위해 주도적으로 친일에 앞장섰던 일부 지주들과 관료와 목숨부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동원된 사람들의 수동적 친일행위를 구분하지 않고 한 그물에 싸서 도매금으로 넘길 위험성이다. 그러나 친일청산 외치는 사람 중에 이 부분을 그렇듯 소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친일잔재청산을 위한 법, 그리고 역사적 교훈으로 삼기 위해 기록으로 남기자는 법이라면 적어도 친일행위자의 주도성과 수동성을 기준으로 엄격히 구분해 기록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전국적 차원에서 주도적으로'라는 기준으로 조사대상자를 제한하게 되면 지역에서는 아무런 역사적 교훈을 남길 수 없게 된다. 많은 국민들이 공감으로 새 옷을 만들어달라고 옷감을 줬더니 누더기로 만들어 입으라고 하니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다.

법 제정을 주도해온 국회민족정기모임 소속 의원들은 "한나라당이 다수인 법사위가  '창씨개명 주창자, 정신대 강요자나 경제적 침탈자(예를 들면 동양척식회사 직원), 조선사편수회 관련자 등 문화·언론·교육분야 친일행위자, 지방 친일부역자를 제외시키고, 군인은 중좌 이상의 계급으로만 한정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17대 국회에서 이 부분을 반드시 수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 국민들은 17대 국회를 그런 온전한 국회로 만들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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