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으론 ‘대학생’, 두 딸 중 ‘막내’, 4인조 밴드 ‘라일락’의 보컬, 중학교 3년부터 내리 알바로 용돈을 번 ‘좀 다른 삶’을 살아온 아가씨, 정치적으론 올해 첫 선거권을 가진 만 19세,.....

윤미나 씨. 고향은 마산, 대학에 입학하며 남해에 처음 왔다고 했습니다.

20대가 보여주는 쾌활함 싱싱함, 터질 것 같은 에너지가 표정에 묻어났고요. 20살, 특별한 나이이고 특별한 추억을 가진 그입니다. 분식점, 고깃집, 커피숍, 햄버거 가게 등등....그가 중 3때부터 5년 간 쉬지 않고 해 본 아르바이트의 업종 나열입니다.

울었던 기억, 즐거웠던 기억, 살아있다고 느낀 기억들 모두가 학창과 아르바이트를 통해 절절히 느낀 것들이라는 데요.

“공부는 조금 뒷전이었다”고 말한 윤미나 씨. 최저 임금에도 미치지 않는 “시간당 2500원, 많을 땐 3500원, 월급을 10만원이 조금 못되거나 30만원이 넘을 때도 있었다. 30만원은 큰돈이고 이중 5만원은 용돈으로 쓰고 나머진 모두 엄마께 드렸다.”

윤미나 씨가 말합니다. “자라오는 과정이 이런 환경을 극복해 나가는 단계였다”고 말입니다.

20대에게서 보기 힘든 ‘성숙과 원숙미’같은 것은 그를 보는 덤이었습니다. “힘든 것을 내색 않는, 엄청 개방적이고 이해심이 많은 나의 엄마가 계시다. 하사관 시험에서 1등으로 입대를 한 언니는 군 부대가 아닌 국방부에서 근무 중이다. 내 언니가 실질적인 가장이다”고 했습니다. “돈을 빨리 벌고 싶다”고 했는데요. 이 말은 엄마에 대한 효도, 언니에 대한 미안함, 자립에 대한 열망이 고스란히 녹았음을 말합니다. “등록금이 싸고 기숙사 생활도 할 수 있어 남해대학을 선택했다”는 말도 이와 상통하고요.

아버지에 대해 말을 아끼는 윤 씨에게 굳이 묻지는 않았지만 윤미나 씨. ‘가족’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또 살갑게 껴안고 있었습니다. 윤미나 씨. 이런 과거에 대해 단 한 치의 “어슬픔이나 슬픔, 아쉬움 같은 게 없다.” 당당했죠.

“아침잠이 없다”는 그입니다. 7시쯤 일어나 오후 6시까지 수업을 듣고 교내 토익공부를 하고, 남해대학에서 20명, 20명 씩 각각 선발해 미국, 필리핀으로 어학연수 프로그램에 기어이 선발되고 싶어 하고요. “남해대학이 귀엽다”고 말하기도 ‘엉뚱녀’이기도 합니다.

“돈을 벌기 위해 서울쪽 호텔에 취직하고 싶다. 결국 내 꿈은 여행 가이드다.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좋아하는 사진을 찍을 거다.”

한때 꿈이기도 했던 ‘밴드’에 대한 이야기는 재기발랄했습니다. 금방 노래라도 부를 분위기 였죠. 창원에서 4인조 밴드 ‘라일락’을 결성하고 놀랍게 고3때 작사 작곡까지 했다는 그입니다. “‘굿모닝’이란 노랠 만들었다. 힘든 학교생활이지만 긍정적으로 살자......” 이런 게 노랫말이라고 했습니다.

“고 3때 이미 행사 무대에 섰고 4명의 밴드가 10분 간 노랠 부르고 10만원을 받아 친구들과 나눠 썼다”고 했습니다. 이 방면에 잔뜩 ‘끼’를 품은 그는, 아직도 무대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윤미나 씨. 이야기 내내 그가 보인 일관성은 ‘삶의 긍정’이었습니다.

“선거요!? 당연히 투표하죠.”
‘패륜녀’ ‘개똥녀’ ‘루저녀’ ‘된장녀’ 등등 이런 얼치기들과는 비교되는 뭔가가 있어보였습니다.

저작권자 © 남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