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당과 천도교가 주도, 24명 옥고 치뤄

86년전 일제의 압제에 맞서 조국의 자주독립을 외치는 함성이 삼천리 방방곡곡에 넘쳐났다. 당시 남해군민들도 크고 작은 독립만세시위를 벌이며 애국애족의 길로 나섰다. 남해의 3·1운동 기록을 통해 당시를 되돌아본다.<편집자 주>

김우영 선생의‘남해군의 항일운동’과 정의연 향토역사관 관장의 ‘남해군의 3·1독립운동’ 기록에 따르면, 남해의 3·1독립만세시위는 2차에 걸쳐 일어났다.

1차 독립만시위는 1919년 4월 3일과 4일 이틀에 걸쳐 설천면내 서당이 중심이 되어 벌어졌다.
당시 설천면 남양리에 살던 이예모(당시 37세)가 4월2일 하동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이 지방의 동지인 정순조(당시 32세), 윤주순(당시 24세), 정몽호(당시 22세)에게 보여주며 궐기를 결의했다.

이들은 다시 동지를 규합하고 대중에게 호소해 4월 3일 오후 3시 남양리 노상에 집결,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형태극기를 앞세우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남해읍으로 행진했다.

읍에서 만세시위를 펼친 이들은 날이 어두워지자 4월 4일 읍장날 시위를 계속하기로 하고 일단 해산했다.
4일의 만세물결은 더욱 거셌다. 전날의 시위로 자신을 얻은 주민들은 더 많은 군중들을 동원했고 가슴이나 짐속에 태극기를 숨기고 장꾼으로 가장해 읍내 시장으로 모여들었다. 오후 3시경 1천여명의 군중이 운집하자 미리 정해진 신호에 따라 태극기를 꺼내들고 만세를 고창했다.

시위 군중들은 군청과 소학교, 우편국, 경찰주재소까지 뛰어들어가 친일관리들을 끌어내어 만세운동을 부르게 하고 순사의 모자와 칼을 뺏어 내동댕이쳤다.

날이 저물어 돌아가던 시위군중들은 전날 자신들의 시위를 사천경찰서에 밀고한 고현면장 김치관 집으로 찾아가 분을 참지 못하고 집을 부수고 해산했다. 4일의 시위에는 1,000여명의 군민들이 참가했다고 기록되고 있다.

2차 만세시위는 6일 오후 3시경 고현면 포상리에서 약 700여명의 군중이
다시 봉기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남해읍으로 행진한 것이다. 1차 시위가 설천면 서당을 중심으로 일어난 것인 반면에 2차 시위는 천도교인들이 중심이 되었다.

이 날 시위에서는 일경과 격렬한 충돌이 일어났으며 일경의 발포로 군중 1명이 즉사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사실여부 확인이 불투명한 상태라고 한다.

이밖에도 이 두 시위의 영향을 받아 이동과 삼동, 남면, 서면 등 지역에서도 산발적인 만세시위가 이어졌다 한다.

남해의 독립만세 운동으로 당시 24명의 애국지사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 중 징역 3년형을 받은 정학순과 유찬숙은 복역중 옥중에서 순국했고, 정갑린은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복역중 고문 후유증으로 출옥하자마자 순국했다.
---------------------------------------------------------------------------------------

인터뷰 - 향토사학자 김우영 선생

“잊혀져 가는 애국지사 안타깝다”

△ 3·1운동에 대한 자료가 별로 없는 것 같다.
= 일제가 기록을 없앴다. 우리남해에서 현재 알려지지 않은 애국지사가 29명 더 있다. 중앙보다 지방에서 활동한 분들의 자료가 없다.

△ 자료 수집과정 등에서 느낀 점은
= 애국지사들이 사람들속에서 잊혀지고 있어 안타깝다. 이것은 보훈정책의 문제다. 국가가 예우하지 않는데 어찌 국민들이 기억하겠는가? 보훈예산이 1.5%불과하다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다.

△시급한 과제는?
=어릴때부터 보훈교육이 필요하다. 현충일을 노는 날 정도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또한 국가유공자에 대한 예우도 개선되어야 한다. 후손들이 긍지를 가지도록 해야 한다.

인터뷰 - 정흥조 애국지사 후손 정희도 옹

“후손 처우 개선되었으면”

△ 정흥조 지사에 대한 기억이 있다면
어머니 말씀으로는 만세운동으로 옥고후 오랫동안 병치레를 하셨고 이후 서당 훈장을 하셨는데 일제가 방해로 몇차례나 옮기고도 끝내 문을 닫았다고 한다. 또 내가 16세때 일경의 시찰에 못견뎌 만주로 갔는데 나에게 “일본놈 밑에서는 일하지 마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 기억난다.
△ 후손으로 긍지가 있다면
= 자랑스럽지만 특별한 것은 없다. 후손으로 약간의 혜택을 받고 있지만 좀 더 개선이 되었으면 한다.
△ 구체적인 바람이 있다면
= 아버지 묘소 가는 길이 포장이 안돼 비나 눈이 오면 다니기가 힘들다. 요즘은 가끔 학생들도 찾아오고 있는데 포장이라도 해 주었으면 좋겠다. 

/ 한 중 봉 기자 bagus10@hanmail.net

  
 
 
  
 
  
  
 
 
  
 
  
저작권자 © 남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